편집부에 근무하다보면 어떤 기사들에선 각 이익집단간의 팽팽한 대립과 그 결과 힘의 역학이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냥 그렇게 대립이 보이고 끝나기도 하지만 어떤 때는 그 정치적 싸움의 결과로 기사의 진퇴가 결정되기도 하죠. 'KBS 도청파문'기사도 그런 류의 기사입니다. 한나라당이나 김인규사장 등 KBS의 수뇌진이 그 플레이어가 되는 건 당연한데 이번엔 엉뚱하게 '박태환'에까지 불똥이 튀기도 했습니다. 어쨌건 도청때문에 자진폐간하는 언론사도 나오는 판에 일국의 제일 공영방송이라는 회사가 너무 당당한 자세로 책임을 피하고 있는 건 동계올림픽도 유치한 우리나라의 '국격'에 걸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국격이라면 애지중지하는 대통령께서는 왜 또 이런 일을 모른 체하고 있는 건지...
아래는 MBC노조 특보에 실린 글입니다. 길지만 한번 읽어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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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공 시대 보도지침의 부활!
- 전영배 본부장은 누구의 보도지침인지 밝혀라!
“아직까지 확인여부가 많은 상태이고 여러가지 면에서 민감 사안,
그러니 데스크 선배들을 믿고 반드시 보고하고 상의한 뒤 스트레이트 기사 쓸 것”
박용찬 보도국 사회2부장이 지난 12일 KBS 도청의혹을 취재하는 부서원들에게 공개적으로 지시한 사항이다. 이후 사회2부에서는 리포트는 커녕 스트레이트 기사조차 사전에 보고를 한 뒤 기사처리 여부를 확인받아야 기사를 쓸 수 있다. 그렇다면 이 기사 작성여부를 판단하고 결정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박 부장이 믿으라고 말한 “데스크 선배들”인가? 아니다. 문철호 보도국장 내지는 그 윗선이다.
지난 22일, 편집부 PD가 사회2부 데스크에게 ‘KBS 도청의혹’과 관련해 경찰이 용의선상에 오른 기자와 한선교 의원 간의 전화통화 내역에 대한 수사를 하고 있다는 내용의 기사를 낮 12시 뉴스용으로 리포트해줄 것을 요구한다. 이 기사는 당일 아침 일부 조간신문에 이어 연합뉴스에까지 보도된 내용이다. 그러자 데스크는 역으로 편집부국장에게 달려가 리포트 여부를 묻고, 편집부국장은 문철호 보도국장에게 다시 묻는다. 문 국장이, 독자적으로 결정했는지 아니면 다른 사람과 상의했는지 모르겠지만, 기사 작성을 최종 승인하자, 사회부 데스크는 취재기자에게 기사를 작성하도록 지시한다. 문 국장은 그것으로도 부족했는지 기사를 작성중인 사회부를 직접 찾아가 “최대한 드라이하게 써라”는 주문을 덧붙인다.
다음은 이후의 상황이다.
“박태환 화면을 받아야 한다며 KBS 도청 의혹과 관련된 기사를 못 나가게 하고 있다. 심지어 문철호 보도국장이 기사를 빼라며 와서 기사를 걷어가 버렸다”
라디오뉴스에 30초짜리 스트레이트 기사를 내보내려고 하자 문철호 국장이 보도를 막았다는 내용이다. 문 국장은 라디오뉴스 담당PD가 자신보다 선배인데 어떻게 자신이 기사를 걷어갈 수 있느냐며 기사를 걷어간 적은 없다고 부인했지만, 보도를 막은 사실은 인정했다.
결국 지난 22일 KBS 도청의혹과 관련된 리포트 기사는 시청률이 지극히 낮은 TV의 낮 12시 뉴스와 오후 3시50분 뉴스에 두 번 보도되고, 시청률이 조금 높은 저녁 6시, 저녁 9시 뉴스데스크에는 전혀 모두 보도되지 않았다. 라디오뉴스에서는 리포트 기사가 나가지 않았다.
처음부터 KBS 도청의혹 보도 외면
회사는 처음부터 KBS 도청 의혹 사건을 소극적으로 보도해왔다. 민주당이 이 의혹을 처음 폭로해 다른 매체가 모두 보도를 하고 나서도 사흘이 지나서야 처음 리포트를 했다. KBS라는 실명이 거론될 때에도 보도를 외면하다, 뒤늦게 KBS와 민주당 주장만 지극히 간단하게 반반 나열하는 식의 불성실한 보도태도를 보여 민실위 보고서(7월4일 노보 참고)의 지적을 받았다. 이후도 마찬가지이다. KBS기자의 노트북과 휴대전화가 압수수색 이전에 교체된 것으로 드러나 증거인멸 논란이 일었을 때도, KBS기자가 경찰에 출두해 조사를 받았을 때도 <뉴스데스크>에서는 관련 내용을 보도하지 않았다.
<뉴스데스크>가 문제가 아니라 스트레이트 기사조차 일일이 보도국장의 허락을 얻어서 쓰고 있는 실정이니, 적어도 이 건에 관한한 MBC에서 특종은 고사하고 다른 언론이 다 보도를 해야 뒤늦게 모양갖추기 식으로 따라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취재기자들이 적극적으로 취재를 하고 싶겠는가.
쿠데타로 집권한 5공화국 시절에 정부는 언론사에 보도지침이라는 걸 내려보낸 적이 있다. ‘이 기사는 몇 단으로 처리해라. 이 기사에서 이런 단어는 사용하지 마라. 이 기사는 절대 보도하지 마라.’ KBS 도청의혹 사건과 관련된 기사처리를 보면 이 보도지침이 다시 부활한 것으로 보인다. 단순한 발생기사인 스트레이트 기사까지도 국장의 허가를 일일이 받아야 쓸 수 있는 것은 5공 시절 이후 유례를 찾기 힘든 사태이다.
누구의 압력인가?
그렇다면 회사에서 KBS 도청의혹 사건 보도를 그토록 막는 이유는 무엇인가? 문철호 보도국장은 1. 경쟁사에 대한 적극적인 보도가 자칫 역풍을 불러 올 수 있다는 것을 이유로 내세웠다. 2. 또 도청을 입증할만한 객관적인 증거 확보가 힘든 상황에서 ‘앞서서 치고 나가기는 힘든 면이 있다’고도 말했다. 3. 박태환 중계 화면과 관련한 KBS의 압박 논리도 제기했다.
문 국장이 말하는 ‘역풍’이란 무엇인가? 상대가 경쟁사이기 때문에 우리가 적극적으로 보도를 하면 역풍이 발생한다고? 경쟁사 간에 특정한 문제로 상호 치열한 다툼이 있는 상황에서 특정하기 어려운 의혹을 파헤친다면 그런 역풍이 발생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 도청의혹 사건은 전 국민적인 관심사이다. ‘국가 기간 방송’이라고 스스로 홍보하는 방송사가 도청으로 얻은 야당의 정보를 여당에게 넘겨줬다는 의혹 사건이다. 공영방송이 취재를 위해 도청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도 충격적이지만, 여당에게 정보를 갖다 바치는 하수인 노릇까지 했을 수 있다는 것 아닌가? 언론사의 도청은 휘청거리고 있는 루퍼트 머독의 미디어 제국에서 볼 수 있듯이 가히 ‘메가톤급 사안’이다.
또 도청을 입증할만한 증거확보가 힘든 상황에 앞서서 치고 나가기는 힘들다고? 김재철 사장 취임 이후 언제 MBC가 정치적으로 예민한 문제에 대해 ‘앞서서 치고 나간’ 적이 있는가? 단적으로 권재진 법무부 장관 후보자와 한상대 검찰총장 후보자를 비롯해 다른 인사청문회 대상자를 상대로 MBC가 앞서서 먼저 검증을 시도한 적이 있는가? 이것도 증거확보가 힘든 상황에 앞서서 치고나가지 말자는 판단 때문인가? 과거 노무현 정부 당시 그토록 검증에 열심이었던 MBC의 스탠스는 어디로 가버렸는가?
그리고 보다 중요한 것은 지금 보도국의 기사 통제가 단순히 ‘앞서서 치고나가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건 어떻게 하면 다른 언론이 다 보도한 뒤에 체면치레용으로 뒤따라갈 것인가를 고민하는 문제이다. 다시 말해 철저히 눈을 감고 외면하는 것이다. 도대체 누구의 압박 때문인가? 지금 보도지침은 과연 누가 내린 것인가?
이 질문에 조금이나마 답을 줄 수 있는 게 박태환 중계화면이다. KBS가 주관사여서 화면을 사야 하는 상황에 KBS에 밉보일 수 있는 보도가 역효과를 낼 수 있다는 논리이다. 만사 다 제치고 그렇다면 MBC는 KBS로부터 이와 관련한 압박을 받았는가? 그게 사실이라면 이것은 더 큰 문제이다. 공영방송이라는 KBS가 야당에 대한 도청으로 모자라 그 의혹을 보도하는 경쟁사에 대해 박태환 중계화면을 걸어서 부당한 압력을 행사하는 것이라면 이건 우리가 폭로하고 싸워야 될 문제이다.
청와대의 ‘김인규 살리기’?
전영배 보도본부장은 분명히 밝혀라. 이번 KBS 도청의혹 보도통제와 관련해 어떤 외부의 압력을 받았는가? 그 당사자가 KBS인가 아니면 청와대인가? 평소 유화적인 성품의 문철호 국장이 이와 같이 무리한 보도통제를 하는 것은 단순히 문 국장의 자체 판단에 그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더욱이 문 국장은 당초 정치부 기사는 몰라도 경찰수사에 관한 보도에는 매우 적극적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문 국장에게 이와 같은 압박을 전달한 당사자는 누구인가?
이명박 대통령 후보의 특보 출신인 김인규 KBS 사장이 이번 도청의혹 사건으로 궁지에 몰린 건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이다. 이 상황에서 청와대가 “김인규 살리기”에 나선 것인가? 그래서 MBC를 비롯해 다른 언론사에 도청의혹 사건 보도를 막고 있는 것인가? 전영배 본부장의 뒤에도 청와대가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전 본부장이 “청와대 파이프라인”이란 오명을 벗고 싶다면 이번 보도통제에 대해 명명백백히 해명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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