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전 글을 보면 아시겠지만, 수습기자시절 나의 일상은 보통 이
랬습니다. 새벽 3시 첫 순찰(원래 2시 30분이었는데 일주일 지나니
까 요령이 생겨서 조금 뒤로 갔죠.) - 5시 30분 일차보고 - 7시 2차
보고 - 아침 취재 - 10시 30분 신문 기사 마감 - 보통 기획기사류
의 오후취재 - 6시 회사복귀 - 12시 라인별 경찰서로 복귀.
여기서 보면 회사에 복귀한 뒤 다시 경찰서로 돌아가기까지의 시
간이 많이 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겁니다. 물론 일지쓰고 취재한
내용으로 습작기사를 쓰는 시간이기도 하지만 회식 또는 야간의 스
페샬프로그램이 마련된 경우가 많죠. 보통 3일을 주기로 하루는 그
냥 회사에서 기사쓰며 보낸다면, 그 다음날은 폭탄주가 한 다섯 잔
이상 씩 도는 회식이 있고 그리고 다음날은 특별취재거리가 떨어지
곤 했습니다.
그 특별 취재들... 새벽시장 취재, 총선과 맞물려 한참 진행 중이던
시민단체 취재 등도 있었지만, 제가 가장 생생히 기억하는 것은 따
로 있습니다.
2주 째로 접어든 첫날이었을 겁니다. 항상 웃는 얼굴로 정겹게 온
갖 욕들을 천연스레 하기로 소문난 관악서의 일진이 우리를 소집했
습니다.
"너와 너는 영등포역 뒷골목, 너와 너는 청량리, 너, 너는 천호동,
그리고 너와 전봉기는 미아리‚"
우리는 생각했다. 이 지명들의 공통점을... ? -> ! -> -_-.
선배는 말했다.
"그래 맞았다. 오늘 너희는 사창가로 취재를 나간다. 일차 인터뷰
대상은 그 곳의 아가씨들이다. 시간되고 돈되면 취재끝내고 자유행
동(?)도 무방하다. 단 개인경비로 충당토록. 이상.‚"
기억하는 분도 있겠지만 당시는 종암서 김강자서장의 취임이후 매
춘이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던 때였다. 마침 김서장 취임 한 달이 지
난 때라 달라진 윤락가의 모습„ 정도의 기사를 위한 취재로 우리가
투입 결정된 것이다. 하필 나는 가장 중요한 바로 그 미아리 텍사스
를 맡게 된 것이다. 중요한 곳이라 나 외에도 둘이 더 가게 되었다.
비록 거기서 가까운 동네에 살고 바로 그 골목 건너편에 있는 S
고교를 졸업했지만, 여전히(?) 내게 그 곳은 미지의 영역이었다. 이
미 TV등에서 여러 번 비춘 곳이었지만 내게는 참으로 새롭고 난감
한 취재대상이었다.
그러나 어쩌랴 우리는 우선 그 골목 입구에 있는 월곡파출소부터
들러 그곳의 분위기 등에 대한 사전취재를 시작했다. 대충 취재를
마치고 나서는 우리에게 파출소장이 말했다.
"경관 몇 명 함께 보내드리겠습니다.‚
아니오. 됐습니다. 그러면 취재가 잘 안 되죠.‚
하지만... 후회하실 걸요.‚"
소장은 나서는 우리에게 의미 모를 웃음을 보냈다. 어쨌든 우리는
보부도 당당하게 그 골목으로 들었다. 그러자 아줌마들이 달려와 우
리를 이끌었다.
어서 오세요. 우리 집 아가씨들이 예뻐요.‚ 아니오 우리집이...‚
저희는 기잔데요...‚
그러면서 우리는 이 아줌마들부터 인터뷰할 생각으로 취재수첩을
꺼내들었다. 그러자 아줌마들...
진짜 기자잖아... 그래 너희들 잘 만났다. 니들 땜에 우리모두 굶
어죽게 생겼다. 이 놈들아...‚
그 이후의 기억은 내게는 마치 파노라마의 장면들처럼 떠오른다.
우리 셋은 앙칼지게 소리지르며 덤비는 아줌마들의 손과 깍두기머리
아저씨들의 주먹을 피해 그 골목의 여기저기를 뛰어다녀야 했다.
김서장의 취임과 그에 이은 단속과 심지어 단전, 단수 그리고 혐
오시설 운운하는 기사와 TV의 고발성 보도에 그 곳 사람들의 언론
에 대한 반감은 극에 달해 있었던 것이다. 그 판에 병아리 기자들이
나타났으니 정말 그들에게 찾고 있던 화풀이 대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쩌랴 우리에게는 그 아줌마 아저씨들 이상으로 일진선배
들이 무서웠다. 나와 동료들은 때리는 그 손과 주먹을 붙잡고 말했
다.
"여러분들 심정 이해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번에 이곳이 가지는
나름의 사회적 역할(?)과 여러분의 고충을 기사화하려는 겁니다.‚"
대충 이런 식으로 달랬다. 아무튼 그 순간 내 머리속에 떠오른 것
은 이런 말이었다.
"What the hell I'm doing here?'
그런 끝에 그래도 좀 나이든 아줌마, 아저씨들을 대상으로 대충
인터뷰할 수 있었다. 마지막에는 그 곳에서 장사하면서 아이들을 모
두 대학보냈다는 한 아줌마의 포장마차에서 오뎅국물로 추운 몸을
덥혔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목표였던 아가씨들의 인터뷰는 할 수가
없었다. 그 투명한 유리벽너머로는 절대 우리를 들여보내지 않았던
것이고 우리는 단지 유리벽 너머의 그녀들을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터덜터덜 그 골목을 나오는데 동료 한 명이 말했다.
확실히 변하긴 변했어‚, 뭐가?‚
물이 옛날같지 않아, 차라리 내 단골집이 있는 청량리가 휠씬 나
은 것 같아.‚, -_-‚
종암서의 골방으로 돌아와 나는 생각해 보았다. 저 사람들을 이
곳에서 싹 쓸어낸다면 문제가 끝인가? 어차피 수요는 있고 그렇다면
어딘가에서 공급은 이루어질 것이다. 그리고 무엇이 혐오스럽고 무
엇이 깨끗한 것인가? 골치만 아프다. 맨날 이런 것만 취재해오라고
하지는 않겠지...
어쨌든 그로부터 2주 뒤 나는 이런 고민에서 해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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