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cord of travel'에 해당되는 글 7건

  1. 2017/08/20 주인장 도쿄여행기2 '우에노 공원에서 본 역사'
  2. 2017/08/13 주인장 도쿄 여행기-1
  3. 2009/11/13 주인장 쓰나미의 추억-3
  4. 2009/10/24 주인장 쓰나미의 추억-2
  5. 2009/10/12 주인장 쓰나미의 추억-1
  6. 2002/09/14 주인장 메이저리그 구장을 가다-2
  7. 2002/09/14 주인장 메이저리그 구장을 가다-1

도쿄 우에노공원의 왕인박사 비석, 타사 특파원 C형의 친절한 해설을 듣고 간 곳이었는데 설명대로 인상적이었던 건 비석건립 후원회 명단이었다. 일본에 한자를 전한 왕인박사의 존재는 내선일체의 좋은 근거였던 것 같고 그래서 당시의 재력가 즉 친일파들은 일제지침대로 돈을 냈다. 가장 맨앞에 있는 건 ‘창덕궁’ 즉 창덕궁에서 살던 조선왕조의 이왕(아마도 영친왕)이고 나머지는 당시 쟁쟁했던 사람들인데 창씨개명한 이름이라 누군지는 알 수 없었다. 아마도 친일파들이 한 일 가운데선 그래도 결국 가치있게 된 몇 안 되는 일인 듯 하다.

그리고 방문한 인근 도쿄 국립박물관, 일본관과 동양관, 서양관으로 건물이 다 별개인 큰 규모인데 서양관은 휴관중이었고 동양관의 중국이나 서남아시아 유물은 솔직히 그렇게 다채롭지 못했다. 그러나 역시 일본관은 일본미술에 친숙치 않은 내게는 새롭고 인상적이었다. 대체로 고대유물은 특히 금속공예품은 역시 여러모로 경주에서 본 부장품들을 연상시켰다. 해설들도 “...한반도에서 출토된 동시대의 백제, 신라 유물에 비해 기술적으로 ‘거의 동등한’ 유물들로서...“라는 문구가 반복되고 있었다. 중국과 한반도의 영향을 받았지만 빠르게 동등한 수준이 됐다는게 자신들의 고대문화에 대한 일본의 평가라 할 수 있겠다. 반대로 보면 우리 고대유물에 익숙한 눈으로 봐서는 일본 고대유물은 유사품 같은 느낌이어서 인상적이진 않았다.

그러나 역시 가마쿠라막부실절부터 에도막부까지 미술과 공예품들은 정교하고 화려한 기교로는 막눈으로봐도 대단했다. 이때부터는 밑에 해설에 ‘한반도와 동등한’ 따위의 문구는 바로 사라졌다. 그런 말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일본관의 마지막은 유럽인상파에게도 깊은 영향을 준 우키요에들이 당당히 자리한 건 그래서 더 당연해보였다. 그런데 반면 동양관 맨위에 자리한 한국관에선 묘한 대비가 엿보였다. 시대순으로 보라는 안내와 함께 우리의 도자기들이 고대토기부터 삼국시대, 고려, 조선초기, 조선후기의 분청사기 순으로 쭉 진열돼 있었다. 고대와 삼국을 거쳐 바로 고려청자들의 세련된 화려함이 잠깐 나오다가 조선 백자에서 “좀 덜 화려하네” 싶은 느낌에서 분청사기나 그 정도도 안되는 듯한 장독대 수준의 자기들로 넘어가면서 보통의 관람자가 보기엔 그야말로 ‘한국 도자문화의 퇴행‘이란 제목 붙이기 딱 좋은 작품진열이었다. 의도가 있어보였지만 그러나 달리보면 조선의 국제화나 경제력이 결국 고려시대보다 낫지 못했다는 방증이기도 하리라. 그에 비하면 일본은 중세부터 이모작도 했고 네덜란드와 교류에다, 에도시대엔 시골의 노동자들이 수도로 와도 임노동을 하고 고향에 돈을 부치는 절반 자본주의사회였으니...

미술사지식이 좀 많았다면 개별작품도 잘 이해했을텐데 그러진 못했다. 모리미술관도 가봤지만 동남아 특별전이라 더 어려웠고 그래도 여행이란 기회에 다른 세계를 접하는 건 확실히 좋은 일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올린에 북마크하기(0) 이올린에 추천하기(0)
2017/08/20 16:06 2017/08/20 16:06
받은 트랙백이 없고, 댓글이 없습니다.

댓글+트랙백 RSS :: http://leadship.pe.kr/tc/rss/response/171

댓글+트랙백 ATOM :: http://leadship.pe.kr/tc/atom/response/171

도쿄 여행기-1

Record of travel 2017/08/13 15:18 주인장

격변기에 휴가를 다녀온 건 앞에 글에서도 말했지만 사실 이번엔 홀로 여행을 했습니다. 우연히 본 CNN의 ‘미래도시 도쿄‘란 기사를 보고 가보고 싶어하는 걸 옆에서 본 와이프가 허가해 줬습니다. 일단 자신은 단거리 아니면 걷기 힘들어 가족이 함께 가기 어려웠던 것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큰 마음씨로 허락해 준 거지요. 15년전 출장때 본 삭막한 도시 도쿄와는 다르게 이번에 여러 면을 보고 왔습니다. 말할 소재는 많지만 우선 짚자면 우연히도 가는 곳마다 언론사들을 맞닿뜨렸습니다. 기자만 천 5백명인가 된다는 아사히 신문이나 우리 회사의 제휴사로 오다이바의 석양과 함께 본 후지티비는 규모가 참 압도적이었습니다. 게다가 후지티비의 건물이 미디어센터와 경영센터로 나눠진 점은 참 우리회사의 신사옥이 무엇을 모델로 했는지를 여지없이 보여줬고요...물론 1층 홍보관에 ‘각키상‘이 주연인 해양드라마의 전시물들이 인상적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역시 가장 감명깊었던 건 롯본기힐갔다가 마주친 TV아사히의 여름 축제 현장이었습니다. 도라에몽과 크레용신짱이라는 두 캐릭터를 양손의 떡처럼 줜 회사답게 사옥의 옥상부터 대형 도라에몽에다가 각종 피겨를 곳곳에 장식했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축제도 각종 애니케릭터와 가면라이더 그리고 퀴즈쇼 참여스튜디오등을 배치해 전체적으로 ‘한여름의 TV아사히 이야기‘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도라에몽과 크레용신짱을 보겠다는 아이들 손을 잡고 가족들이 몰려들고 아이들이 캐릭터와 노는 동안 어른들을 위해 한편에선 아사히 맥주 신제품과 역시 그 계열의 프리미엄 후지 생수 시음회를 열고 있더군요. 청소년들을 위한 아이돌그룹 공연 역시 촘촘하게 펼쳐졌습니다. 이야기를 가진 캐릭터를 기초로 다른 영역으로 멀티유즈하는 전형적 전략이었습니다. 물론 그외에도 TV도쿄나 다른 방송사들도 간판뉴스 앵커들과 드라마 캐릭터들을 사옥 전면에 내세우며 컨텐츠 제일주의의 면모는 확실히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무한도전이나 복면가왕말고는 내세울 캐릭터들이 없어진 MBC의 현재가 허무하게 느껴졌습니다. 대한민국 전체 뉴스와 교양프로 저널리즘 영역을 통틀어 가장 브랜드가치가 높다고 할 PD수첩을 스스로 고사시킨 우리 회사 경영진들의 대단함을 다시한번 대조적으로 느꼈구요. 이 자체만으로도 배임이고 횡령이고 뭣보다 전문성과 윤리를 위해 싸운 기자와 피디들 전문직의 가치를 저 멀리 날려버린 ‘자해행위‘입니다. 도쿄에서 역설적으로 MBC의 위기와 그 위기를 만든 주역들을 느껴본 3박 4일이었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올린에 북마크하기
2017/08/13 15:18 2017/08/13 15:18
받은 트랙백이 없고, 댓글이 없습니다.

댓글+트랙백 RSS :: http://leadship.pe.kr/tc/rss/response/170

댓글+트랙백 ATOM :: http://leadship.pe.kr/tc/atom/response/170

쓰나미의 추억-3

Record of travel 2009/11/13 00:23 주인장
좀 늦은 업데이트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쓰나미 취재의 가장 중요한 얘기들은 아직 시작도 못했습니다.

할얘기는 많은 출장이었지만 사진은 한 장도 없습니다. 집에도 못가고 회사에서 바로 출발하느라 카메라를 못 챙겨서이기도 하지만 챙겨갔다고 해도 무엇을 찍을 수 있었을지 그리고 공개할 수 있었을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 뒤부터의 얘기는 다소 거북스럽게 느껴질 수 있으니 감수성이 예민하신 분들은 읽지 않으셔도 무방하겠습니다.

푸켓에 도착한지 사흘째 되는날부턴 저는 화상전화 엔지니어에서 취재기자로 돌아가 피해현장으로 돌아다녀야 했습니다. 그 첫날 간곳은 '카오락'이라고 아시는 분은 알겠지만 그 당시 새로 개발되기 시작했던 푸켓 인근의 리조트단지였습니다. 전에도 말했듯 피해가 집중된 곳이었죠. 그곳을 향해 출발한 봉고차, 위성송출시간에 대기위해선 도착해서 2시간 안에 취재를 마쳐야 해서 조금은 긴장하고 미리 상황파악을 위해 하루 일찍 온 동료와 선배기자에게 여러가지를 물었습니다. 그러나 함께 현장으로 향하던 그 둘은 뭔가 단 하루만에 지친 표정을 지으며 건성건성으로 말했습니다. 무엇때문에 단 하루만에 지쳤을까? 궁금한 일이었습니다.

드디어 도착한 카오락, 차는 임시 시체안치소로 변한 절로 향했습니다. 우리의 임무는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신수습현장을 스케치하고 사망자 통계를 취재하며 그 무엇보다 중요한 한국인 사망자 발생여부를 현장에서 확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가장 중요한 취재처는 바로 시체안치소였습니다.

그런데 차가 절앞에 멈추자 선배와 동기 기자 둘은 차안에서 나오려하지 않더군요. 그러면서

"어제 너는 안 했으니 봉기 너 혼자 들어가서 취재해라"라고 말했습니다.
뭐때문에 저러는지 저는 불만스러워하면서도, 역시 절대 안 들어가려하던 카메라기자 - 저보다 후배였음 - 를 끌고 절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가장 먼저 저에게 닥쳐온 현장의 충격은 시각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냄새'였습니다. 한여름 노량진 수산시장의 쓰레기장에서 풍기던 그 냄새와 비슷한 그러나 강도가 10배는 세고 뭔가 기기묘묘한 음산함과 역거움이 동시에 제 몸을 감쌌습니다. 그 충격에 지끈거리는 머리를 몇번이고 흔들며 진정하자 그제서야 비닐포대에 싸인 4,5백 구쯤 되는 시신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숨진 사람들은 수천명 나중엔 5천명으로 확인됐죠. 그러다보니 병원의 냉동고는 이미 만원이 된 지 오래였고, 태국정부는 원래 태국의 전통대로 시신들을 절에 모았습니다. 그러나 절이란 곳은 원래 시신을 화장하는 곳이었지, 보관을 위한 시설은 없었습니다. 단지 마당에 비닐포대 깔고 '깔아놓았을 뿐'이었죠. 해서 그곳엔 동서양, 남녀노소의 시신들이 다 모였고, 그 각각은 천차만별의 부패상태를 보여주고 있었죠.

그리고 무엇보다 기분 나빴던 건 바닥의 흥건한 액체들. 그 정체를 알기에 안 밟으려고 무던히 애썼지만 결국 피할 길 없어서 밟아야 했고 그러면서 저와 카메라기자는 혹 있을 지 모르는 한국인 시신을 찾아 그곳을 돌아다녔습니다. 물론 교민단체와 한국대사관에서 나온 이들과 함께였죠. 그러다 누군가가 여기를 보라고 외쳤고 가보니 비키니를 입은 한 동양여자의 시신이 있었습니다.

비닐포대위에 엎드려 있던 시신, 가스로 인해 부풀어있었지만 그래도 도저히 사람으로 안 보일 정도로 거대풍선처럼 부풀어있던 다른 시신에 비교하면 작은 체격의 동양인이라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엎드린 상태라 얼굴을 볼 수 없어 확인이 어려운 상황.

해서 카메라기자와 저는 태국인 관리인들에게 시신을 뒤집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저는 거의 기절할 듯 놀랐습니다. 그 여자의 얼굴이 움직였기 때문이죠. 하얀 얼굴이 물결치듯 움직였던 겁니다.

놀란 저는 다시 얼굴을 쳐다보고 그리고는 놀라움과 메쓰꺼움으로 몸서리를 쳐야 했습니다. 그 하얀물결은 바로 구더기떼였습니다. 얼굴전체를 하얀 구더기들이 촘촘하게 덮은채 꿈틀거리고 있었습니다. 눈, 코, 입 어느것도 보이지 않고 오로지 구더기뿐이었습니다. 도저히 그 상태론 어느나라 여성인지 알 수 없는 상황, 우리는 다른 시체들을 보러 돌아다니다 대개 그 현장에서 스탠드업- 기자가 현장에서 상황을 설명하는 기사문을 읽으며 화자로서 나오는 것-을 했습니다. 마스크를 쓴채 하는 스탠드업이었는데 냄새때문에 나오는 헛구역질로 몇번을 다시해야 했습니다. 그날 리포트는 무사히 나갔지만 호텔로 돌아오자 저는 온몸에서 기운이 빠지는 걸 느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고통은 계속 이어졌습니다. 당장 그날밤, 겨우 4,5시간밖에 잘 수 없었던 상황에서 저는 그 잠마저도 설쳐야 했습니다. 꿈속에서 그 '구더기 얼굴'이 나왔으니까요. 그리고 그 다음날 꿈에도 구더기얼굴은 또 등장했습니다.

사실 지금도 그 하얀물결 치던 얼굴은 아직도 제 뇌리에 남아 그날의 메스껍던 냄새와 함께 공감각적인 공포로 남아있습니다.
 
이올린에 북마크하기(0) 이올린에 추천하기(0)
2009/11/13 00:23 2009/11/13 00:23
TAG
받은 트랙백이 없고, 댓글이 없습니다.

댓글+트랙백 RSS :: http://leadship.pe.kr/tc/rss/response/65

댓글+트랙백 ATOM :: http://leadship.pe.kr/tc/atom/response/65

쓰나미의 추억-2

Record of travel 2009/10/24 00:12 주인장

좀 늦은 업데이트입니다.

골치아픈 위성전화기 세트를 끌고 푸켓 공항에 내린 저는 그래도 먼저 온 팀들이 보내준 차량을 타고 우리 팀이 자리잡은 호텔에 도착했습니다. 푸켓수준으로 그다지 좋지않은 호텔이었지만 그래도 쓰나미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고 뜨거운 태양아래 푸른 바다가 보이더군요.

당시 푸켓지역의 쓰나미 피해를 좀 설명해보면 제주도만한 섬인 푸켓섬과 그 주변에서 크게 4개지역에서 피해가 발생했습니다. 한 곳은 푸켓의 중심지인 빠통비치였는데 이곳의 피해는 크지 않아서 해변의 상가들이 부서지긴 했지만 인명피해는 수백단위가 안되었습니다.

반면 푸켓의 인근의 신흥 휴양지로 푸켓 중심지와는 2,3시간 거리인 크라비와 카오락 2개지역은 큰 피해를 입어 각각 수천명이 숨졌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푸켓섬에 붙은 또 하나의 섬인 피피섬도 큰 피해를 입어 섬 전체가 거의 초토화된 상황이었습니다.

취재진의 베이스캠프는 호텔들이 많은 빠통비치로 그곳의 메리엇트 호텔에 임시 위성송출센터가 마련됐고 세계 각국의 취재진 인근 호텔에 자리를 잡고 취재를 시작한 상황이었습니다.

아무튼 저는 도착하자마자 그날 저녁뉴스부터 시작할 화상연결을 위해 위성전화기를 설치하기 시작했습니다. 호텔 마당에다가 장비를 늘어놓은 뒤 우선 태국상공 어딘가에 떠있는 타이콤3 위성을 향해 나름 계산한 각도로 평면안테나를 펼쳤습니다. 그리고 그 안테나의 케이블을 대형 노트북처럼 생긴 본체에 연결하고 그 본체는 또 호텔 식당에서부터 끌어온 전원에 연결했죠. 또 오디오 콘솔에 마이크를 연결했습니다. 그리고는 영어로 된 매뉴얼을 보며 본체의 키보드를 두드려가며 세팅을 했습니다.
 
그러나... 잘 안되더군요. 1시간 가량 낑낑대서 연결해 서울의 본사와 화상은 연결됐으나 아무리 마이크로 외쳐도 소리는 전달이 안되는 거였습니다. 그러는 사이 뜨거운 태국의 태양아래 제 얼굴은 익어버렸고, 그리고 그 화상도 품질이 그다지 좋지 못했습니다. 뭐 사실 가져올때도 회사의 기술자들이 여러명이 달라붙어 2,3시간 만지작 거린 끝에 제게 넘겼으니 잘 될리가 없었죠.  그렇게 고생하는 사이 취재를 마치고 돌아온 동료들은 까맣게 탄 제 얼굴과 위성전화기를 보더니 "집어치고 우리 일이나 도와"라고 외쳤습니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다음날 회사에선 오늘도 다시 화상전화 연결을 해보라고 닥달했습니다. 뭐 어쩔 수 없이 시키는 대로 시작했는데 이번엔 무려 4시간 동안 고생한 끝에 소리가 연결이 됐습니다. 안 된 이유는 오디오 콘솔의 셋팅이 제대로 안돼 있었기 때문이었죠. 오디오 콘솔이란건 만져본 적도 없는 저로선 당연히 안 될 수 밖에 없는 일이었는데  출발할 때 콘솔 조작법은 당연히 배우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아무튼 연결이 되자 서울에선 바로 화상연결 생방송을 준비하라고 했죠. 그래서 하루전에 온 기자 2명(저보다 3기수 위 선배 1명과 동기 1명) 가운데 동기였던 박모기자가 생방송 타자가 됐고 저는 엔지니어로 방송을 뒷받침했습니다. 9시 뉴스데스크에 맞춰 연결을 하게 됐는데 시차때문에 푸켓은 8시가 한국의 9시였습니다. 화상연결의 배경을 호텔로 할 수는 없어서 호텔마당에서 해변쪽을 보이게 세팅을 했죠. 그러나 밤인지라 어두운 건 어쩔 수 없었고 카메라 조명으로 생방송 담당 기자만 보이게 했습니다. 그런데...

서울의 데스크는 조명을 구해서 뒤에 해변도 보이게 하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등하나 없는 광활한 해변을 보이게 하라니... 카메라 기자는 황당해하며 드라마 촬영 때 쓰는 조명트럭 10대는 필요하다고 드러누웠죠. 현지 상황을 전혀 모르는 데스크의 무모한 지시였는데 이런 말도 안되는 지시는 그 뒤로도 계속 이어졌습니다. 어쨌든 그래도 노력은 해봐야 한다는 생각에 결국 구한건 마침 파티준비를 위해 호텔식당에 있던 조명등과 크리마스 트리용 전구들이었습니다. 그 등과 전구를 역시 호텔에서 빌린 옷걸이에 걸어서 임시 조명세트를 만들어 설치했죠. 뭐 그래봤자 뒤에 모래사장이나 조금 보이는 정도였지만요...

어쨌든 고생끝에 시작된 생방송. 서울에선 큰 기대를 한 화상 연결이었지만 화상전화기로 연결된 동기기자 박모씨의 얼굴은 물에 불은 감자마냥 흐리멍텅하게 나왔죠. 뭐 그래도 방송자체는 긴박감있게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해변 답게 갑자기 광풍이 불더니 박기자의 원고가 바람에 날아가려했습니다. 저는 번개같이 옆으로 돌아 화상전화기의 카메라에 안보이는 화각밖으로 '기어가서'는 팔만 내밀어서 원고를 잡아줬습니다. 기자가 취재는 안하고 참 별 짓 다한 하루의 마지막 마무리였던 셈입니다.

생방송은 사고없이 잘 마무리 됐습니다. 그러나 다음달 편집회의에선 '물에 불은 감자얼굴'얘기가 나오며 그런 화질 밖에 안되는 장비를 왜 가져갔냐는 말이 나왔죠. 그럴 걸 왜 그 고생시키며 가져가게 했는지......

결국 그 화상전화기는 그날이후 다시 사용되지 않았고 저는 바로 취재인력으로 전환됐습니다.

이올린에 북마크하기(0) 이올린에 추천하기(0)
2009/10/24 00:12 2009/10/24 00:12
받은 트랙백이 없고, 댓글이 없습니다.

댓글+트랙백 RSS :: http://leadship.pe.kr/tc/rss/response/63

댓글+트랙백 ATOM :: http://leadship.pe.kr/tc/atom/response/63

쓰나미의 추억-1

Record of travel 2009/10/12 07:35 주인장

  얼마전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섬에 강진이 있었습니다. 국제부에 근무하는 사람으로선 오랜만에 일거리하나 터진 셈이었는데, 그래도 현장에 가는게 아니라 전화취재를 하고 외신 그림 정리하고, 현장에 간 특파원의 취재를 지원하는 일이라 힘들었다고는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제겐 가슴이 철렁한 순간이 바로 이 지진과 쓰나미 뉴스들입니다.

  처음엔 미국령 사모아에 강진에 이어 쓰나미가 덮쳤죠.  우리 교민 피해가 있어서 안타까왔지만 인구밀집지대는 아니었던게 천만다행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다음날 인도네시아에도 강진이 났습니다. 그 뉴스를 보는 순간 두려움이 앞서더군요. 바로 2004년말 동남아시아를 덥쳤던 쓰나미의 기억때문이었습니다.
 
  2004년 크리스마스때 인도양에서 발생했던 강진과 그에 이어서 동남아로 번져간 쓰나미. 인도네시아, 스리랑카, 태국, 몰디브 등에서 무려 24만명이 숨졌습니다. 당시 2004년 12월 24일 처음엔 로이터 등 외신의 1보는 쓰나미로 수십명 사망이었습니다. 그런데 2보 3보 갈수록 사망자 숫자가 몇백, 몇천 단위로 기하급수적으로 늘었고, 혹시나 하는 생각에 당시 야근하던 기자들은 여행사 등을 취재하기 시작해 결국 우리 여행객들의 피해까지 확인하게 됐죠.

  하여 크리스마스 당일 우리회사에선 기자들 몇명이 특별취재팀으로 인도네시아, 태국 등지로 파견됐습니다. 당시 제가 속해있던 기획취재부에서도 2명정도가 갔죠. 저는 그것을 피했다며 속으론 안도했는데...

  바로 다음날 26일 편집회의를 마치고 나온 부장이 제게 그러더군요. 너도 가야한다고, 그것도 지금 당장!.

  우리 여행객 피해가 난 태국 푸켓의 보도가 급한데 현지에서 간이로나마 생방송을 할 위성 화상전화기를 취재단이 안 챙겨갔다며, 그래서 제가 가지고 가서 현지에서 설치해서 방송하는 엔지니어 역할을 하라는 거였습니다. 결국 부랴부랴 여행사에 전화해서 표를 부탁하고 바로 집에 전화해선 와이프보고 '집에 갈 시간 없으니 바로 여행짐 챙겨서 회사로 오라'고 전했죠. 그리고 나선 회사 옥상에 올라가서 그 화상전화기 설치를 연습했습니다.
  회사 기술팀에서 옥상으로 올라오라고 할 때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가보니 그놈의 화상전화기라는 놈을 펼쳐놓고 기술팀 사람들이 씨름하고 있더군요. 대형노트북 같은 본체에 펼치면 꽤나 커지는 평면 안테나 2개에 오디오콘솔, 그리고 각종 케이블 등 한 짐이었습니다.
  그런데 기술팀 사람들도 이 화상전화기를 몇달만에 창고에서 꺼내봤다며 그날 오후에 출발해야해 바쁜 저를 2시간 가량 세워놓고 계속 조작만 했습니다. 결국 2시간만에 화상전화기에 화면이 떴고 그걸 보더니 이제 됐다며 자기들이 한 대로 하면 된다며 들고 가라고 했습니다. 당연히 어떻게 사용해야 할 지 불안하기만 했지만 어쨌든 저는 이민가방 2개만한 크기였던 화상전화기 세트를 끌고 태국 방콕행 비행기에 올랐습니다.

  그래서 일단 도착한 방콕 공항, 심야에 도착한 저는 국내선 터미널로 이동해 푸켓행 비행기를 티켓팅할 때까지 아침까지 무려 8시간 가량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졸린 것도 문제였지만 가장 문제는 따로 있었습니다. 바로 덩치 큰 화상전화기!
화상전화기 가방를 밀고 다니며 기다리다 몇 시간이 지나니 화장실이 가고 싶어졌죠. 그런데, 이 전화기 가방이 화장실 입구보다도 더 컸습니다. 다른 여행객들은 가방을 밀며 화장실로 들어가는데 저는 이 비싼 장비를 밖에 두고 갈 순 없었죠. 그때부터 물도 안 먹고 참고 참으며 몇시간을 버텨야 했습니다. 그러기를 7시간째 티켓팅 시간이 1시간 쯤 남았을 무렵 낯익은 얼굴 하나가 지나가더군요. 얼마전 관악경찰서 기자실에서 인사했던 CBS기자가 지나가고 있었던 겁니다.
   당장에 그 기자를 불러 화상전화기를 보고 있으라고 말하곤 장장 7시간 만에 생리현상을 해결했습니다.
  
  참 황당한 고생이었지만 사실 그 재해의 현장에서 겪었던 일들에 비하면 사소한 '시작'이었습니다.

이올린에 북마크하기(0) 이올린에 추천하기(0)
2009/10/12 07:35 2009/10/12 07:35
받은 트랙백이 없고, 댓글이 없습니다.

댓글+트랙백 RSS :: http://leadship.pe.kr/tc/rss/response/61

댓글+트랙백 ATOM :: http://leadship.pe.kr/tc/atom/response/61

최희섭과 김선우, 물론 김선우가 메이저리그 데뷔는 물론 대학선배이기도 하지만 둘다 아직 풀타임 메이저리거가 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젊은 선수라는 점에서 똑같습니다. 그런 둘이 이번 9월부터 최희섭은 처음으로 김선우는 다시금 메이저리그 출전기회를 가졌죠. 그래서인지 이번만큼은 감독의 눈에 들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심했습니다.

  그래서 둘다 야구장에선 절대 인터뷰를 안하겠다며 고집부려 좀 재미난 취재를 원했던 저를 실망시켰죠. 하지만 둘다 야구에만 전념하기 위해 그런 거니 별 불만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나름대로 저는 그들을 돕기 위해 노력했죠.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메이저리그 감독들은 물론 철저히 실력위주로 선수기용을 하지만 역시 프로인 만큼 또 하나의 다른 요인도 작용합니다. 바로 흥행성이죠. 언론의 관심은 그런 점에서 선수에게 플러스 요인이 됩니다. 한국취재진 특히 중계권 가진 방송사의 관심은 감독들에게도 부담이 되는 거죠.

  첫째날 최희섭의 시카고 컵스 감독 브루스 킴을 만났습니다. 인터뷰를 통해 무언의 압력을 가했고 결국 셋째날 경기에선 선발등판 시키는 등 나름대로 신경(?)을 써 주더군요....

  더 재밌는 건 김선우의 몬트리올 감독이었습니다. 왕년의 명타자였던 프랭크 로빈슨....

이 할아버지를 인터뷰하며 우리는 김선우를 언제쯤 볼 수 있겠냐며(당시 선우는 메이저리그 엔트리엔 들었지만 출장은 못하고 있었거든요.) 하소연했고 또 한국에서 사온 약간의 기념품을 뇌물(?)로 제공했습니다. 너털 웃던 감독, 그러더니 우리의 질문에 다시 망설이더니 다음 로테이션부터 선발로 기용하겠다고 말하더군요.

  그리고 바로 다음날 아마도 컨디션 점검 차원이었겠지만 바로 중간계투로 등판시켰습니다. 김선우는 2이닝을 완벽하게 막아냈죠. 물론 김선수는 이런 사실을 모르겠지만 저는 나름대로 약간의 노력으로 큰 성과를 얻었음에 만족했습니다.

  이들 젊은 루키들에 비하면 박찬호는 역시 거물, 그러나 나쁜 의미에서 너무 거물이었습니다.

현지교민들로부터 박찬호가 이제는 어린이들이 사인을 부탁해도 외면하며 심지어 눈길조차 주지않는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반신반의했지만...

   경기가 끝난 후 가진 인터뷰에서 박찬호는 그저 우물거리는 말로 몇가지 대답하곤 바로 돌아섰죠. 제가 한가지만 더 묻겠다고 했지만, 막무가내였고... 뭐 그 정도갖고 기분나쁘게 생각하는 제가 좀스러운 것 일 수 있겠지만,

 이번 출장에서 만난 더 위대한 선수들, 새미소사나 알렉스 로드리게스와는 너무나 대조되는 모습이었던 것만은 부정하기 힘듭니다. 이 두명의 슈퍼스타들은 언제나 이름을 부르는 팬이 있으면 항상 손을 흔들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저를 포함한 기자들이 일단 질문을 던지면 간단하게나마 답을 해주고 더 자세히 답을 못해줄텐 그 사정을 말하고 양해를 구하곤 했습니다.

  기량면에선 스타이고 특히나 우리 입장에선 유일하게 성공한 메이저리거인 그가 전혀 스타성을발휘하지 못하는 모습은 조금은 실망스러웠습니다.

* 오해가 있을 수 있어 사족을 달자면 이글은 2002년 9월에 작성된 글임을 다시 밝힙니다. 현재의 박찬호 선수는 그 당시 제가 겪었던 모습과 다르게 팬들에게 자상하게 신경을 쓰고 있는 것 같습니다. 혹 이 글을 처음 보시는 분들은 제가 예전 홈페이지에 올렸던 글들을 다시 이 블로그에 옮기고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둬 주시기 바랍니다.

이올린에 북마크하기(0) 이올린에 추천하기(0)
2002/09/14 22:55 2002/09/14 22:55
받은 트랙백이 없고, 댓글이 없습니다.

댓글+트랙백 RSS :: http://leadship.pe.kr/tc/rss/response/13

댓글+트랙백 ATOM :: http://leadship.pe.kr/tc/atom/response/13

지난 한 주(9.8 - 9.15) 미국을 다녀왔습니다.

타자로선 최초로 메이저리거가 된 최희섭과 다시 메이저리그에 올라온 투수 김선우의 경기를 취재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최희섭의 시카고 컵스와 김선우의 팀 몬트리올 엑스포스가 시카고에서 3연전을 가졌던 겁니다. 그리고 거기에 박찬호의 시즌 9승 경기도 추가로 취재했죠.

먼저 시카고.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컵스팀의 홈그라운드이자 미국 중부 최고의 대도시, 포스트 모더니즘 건축물에서부터 금세기 초반의 고전건축까지 갖가지 건물들이 위용을 자랑하더군요.

  그중 우리가 찾은 시카고의 홈구장 리글리 필드는 담쟁이 덩굴이 담장을 장식하고 있는 유서깊은 야구장이었습니다. 야구장 밖은 마치 아케이드 형식으로 기념품가게와 핫도그 등 푸드점들이 자리해 분위기가 독특했죠. 관중들은 먼저 외벽의 출입구로 입장해 아케이드를 지나며 야구공이나 유니폼을 산뒤 핫도그를 사서 내벽 입구를 통해 관중석에 들어서는 구조죠.

  사실 오래된 구장이라 안에 시설은 형편 없었습니다. 하지만 일하는 사람들은 내가 좋아하는 야구를 보며 봉사한다는 즐거움이 가득한 이들이었고, 구장에는 묘한 축제 분위기가 넘쳤습니다. 또 관중석과 필드간의 거리가 아주 가까워서 정말 안으로 떨어지는 파울볼을 잡아 챌 수 있더군요. 그라운드는 멀고 그나마 그물이 앞을 막아 치어리더나 구경해야 하는 우리하고는 구조자체가 달랐습니다.

그곳에서 만난 김선우와 최희섭....

이올린에 북마크하기(0) 이올린에 추천하기(0)
2002/09/14 22:53 2002/09/14 22:53
받은 트랙백이 없고, 댓글이 없습니다.

댓글+트랙백 RSS :: http://leadship.pe.kr/tc/rss/response/12

댓글+트랙백 ATOM :: http://leadship.pe.kr/tc/atom/response/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