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ding Culture'에 해당되는 글 10건

  1. 2016/04/15 주인장 뉴욕타임즈VR팀이 말하는 VR 저널리즘
  2. 2014/06/29 주인장 트랜스포머 신작에서 본 이상한 이항대립
  3. 2010/08/16 주인장 스타2, 이야기의 아쉬움
  4. 2010/03/26 주인장 재밌는 만화 (2)
  5. 2009/09/15 주인장 의료보험개혁과 여론의 조작
  6. 2009/08/24 주인장 CNN과 폭스뉴스 (1)
  7. 2008/08/16 주인장 문화연구의 한 방향 'X파일'
  8. 2008/07/18 주인장 관음의 대상으로서 남성
  9. 2003/06/25 주인장 '지하철 1호선'과 '백조의 호수'
  10. 2003/01/25 주인장 보이지 않는 위협 - '사랑'

트라이베카 영화제가 올해는 VR기술과 영화를 주요한 테마 중 하나로 잡고 VR영화들만 따로 ‘VR Arcade’라고 묶어 상영한다. VR이 요새 삼성 등 전자업체들의 주요한 먹거리로 떠오른다는 것은 들었지만 영화제에서 상영할 정도의 제대로 된 영화들이 있나하는 의문을 가졌을 정도로 나로선 생소한 분야다. 그런 생소함 때문에 뉴욕타임즈VR팀이 나온 트라이베카 영화제의 한 talk행사에 가봤다.

뉴욕타임즈는 구글의 카드보드라는 VR장비(라고 하기엔 그냥 골판지다)를 독자 100만명에게 뿌린 뒤에 난민캠프 등을 소재로 한 VR영상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나로서는 디지털 퍼스트를 말로만 외치는게 아니라 이것저것 다해보는 그들의 부지런함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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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담자로 나온 뉴욕타임즈 magazine의 수석편집자나 VR팀의 실무자들은 명랑하고 젊은 에너지가 넘쳐 보였다. VR이 독자가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현장을 보고 이해하는 자유를 주기에 저널리즘의 큰 변화라는 긍정적인 대전제를 깔고 자유롭게 이야기를 전해갔다. VR기술을 처음 접했을때의 흥분, 그 흥분을 다른 편집자들에게도 전해서 VR영상제작의 필요성을 동감하도록 회사를 돌며 VR을 보여줬다는 얘기라든가 편집국의 각 데스크들이 너나없이 자기들의 기사도 VR로 만들어달라고 한다는 이야기 등은 그들의 열띤 분위기를 전해줬다. 그리고 난민캠프를 다룬 VR영상이 난민들의 어려운 삶을 다른 어떤 매체보다 가장 쉽게 독자들에게 이해시키는 등 확실한 전달력을 VR이 보여주고 있으며 다른 영상과 달리 제작자의 의도대로 왜곡될 가능성도 아주 적다는 등의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또 실시간 VR로 뉴스 현장을 보여주는 ‘360도 streaming’ 은 가장 발달된 독자와 언론사간의 상호작용이 될 것이고 독자의 능동성이 가장 크게 발휘되는 기회가 될 것이라는 등의 설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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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약간은 기술결정론(?)적인 낙관론을 들으며 한편으론 독자에게 무제한적인 자유를 주고 창작자의 의도에서 벗어나게 해 주는 게 새로운 저널리즘이라는 설명이 모순적으로 들리기도 했다. 하나의 이야기로 결정해 전하는 것이 아니라 화면의 이곳저곳을 찍어보면서 독자가 알아서 이야기를 만들어보라는 건 영상뉴스가 아닌 건 둘째치고 비디오 게임에 가까우니 말이다. 난민캠프 VR영상도 사람들이 이미 기사를 읽어 인지는 하고 있던 난민문제를 영상으로 다시 생생하게 보여줘 절감하도록 도와줬다는 보조적 역할로 봐야할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 이런 생각으로 VR이 새로운 스토리 형식을 만들고 있다고 봐야하냐는 질문도 있었던 것 같은데 아직은 그런 형식은 없다는 당연한 답을 들을 수 있었다. 그 외에도 VR카메라 앞에서의 연기자는 하나의 시각이 자신을 관찰하고 360도가 보여진다는 것을 의식해야하는 새로운 경험을 하고 있다 라든가 소리도 입체성을 가져야한다는 등의 자잘한 이야기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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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중 가운데 한 명은 “뉴욕타임즈는 어떤 영역에서 자리를 잡으려는 것이냐? 언론이냐? 통계회사냐? 여행사냐? 유료 인터넷 영상제작사냐?”하면서 돈 되는 건 다하는 거냐는 비판적 뉘앙스의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생각해보면 정작 문어발기업이긴 하다.
  • 삼성이 첼시에 문을 연 ‘Samsung 837’이란 플래그십 스토어가 이 행사의 장소였다. 랜드마크가 되고 있는 애플의 매장들에 비해 형편없이 처진다는 비판을 엄청 받던 삼성이 그 때문인지 꽤나 공들여 만들어놨다. 애플매장의 깔끔함에 한국의 아파트 모델하우스의 서비스가 더해진 느낌인데 VR체험코너들은 인상적이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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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4/15 23:09 2016/04/15 2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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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시간반이 넘는 시간을 들여서 본 트랜스포머 신작은 뭐 인상적이지 않았다. 그런데 한가지 인상적이었던 대목은...

전작에서 아작났던 시카고는 또 아작이 나는데...시어즈타워니 행콕타워니 하는 랜드마크들 박살났던 곳 또 박살나지만 이번에 이를 지키는 미공권력은 나타나지 않는다...사실 이번편에서도 미국의 숨겨진 정보기관은 인류와 오토봇을 팔아먹고 무능한 백악관은 뭔일 났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홍콩에선 조금 양상이 다르다. 홍콩도 역시 전쟁터가 돼서 빈민가 아파트부터 항구의 대형타워들까지 아작나는데...박살나기 시작하자 마자 홍콩정부 관료들이 기민하게 외친다, "중앙정부에 도움을 요청해!"

그러자 놀랍게도 영화는 바로 베이징의 중앙정부로 장면전환되고 중국 국방장관이 보좌관들과 함께 당당히 멋진 국방부건물로 들어서며 기자들에게 외친다. "우린 홍콩을 방어할 겁니다"

그리고 중국인민해방군의 전투기들이 홍콩의 하늘을 누빈다.(물론 트랜스포머들과 싸우진 않고 그냥 날아만 다닌다. 인민해방군 전투기들이 트랜스포머들을 물리치면 그냥 엄청난 설정파괴일테니...)

암튼 국민을 팔아먹고 무능력한 미공권력 vs 외계인에 맞서 책임있는 모습을 보이는 중국 인민해방군 의 이분법은 뭔가 조금 이상하다. 그러나 달리 생각해보면, 홍콩 올로케를 허용하고 지원한 중국정부가 아마도 세게 한 마디 했을 것이라는 짐작은 든다. 게다가 중국 영화시장이 좀 큰가, 중국 관객들의 국수주의적 욕구를 충족시켜줘야 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내년에 개봉한다는 서울에서 얼마전 찍은 어벤저스2에서 한국정부는 어떻게 나올까? 설마 박근혜 대통령이 "우린 서울을 지킬겁니다"하는 말을 하면 F15가 서울 하늘을 날아다닐려나??

북한의 구닥다리 방사포, 미사일도 막아야지, 부적응 병사들의 총기난사도 막아야지, 전우주적 파워의 슈퍼 빌리언들과도 싸워야지 다채로운 과제를 안은 한국군만 죽어나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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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6/29 23:11 2014/06/29 2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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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그다지 즐거울 것 없던 대학원생 생활의 한가지 낙은 피시방에 모여 저녁내기 스타크래프트 한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도 그 멤버들끼리는 가끔 만나고 있고, 그리고 그 가끔 중 아주 가끔은 피시방에서 다시 게임을 하기도 했습니다.

12년만에 다시 나타난 스타크래프트2는 참 많이 바뀌었습니다. 무엇보다 3D로 바뀌고 현란한 색채와 음향효과로 중무장해 최신사양의 컴퓨터로도 버겁게 돌려야 하는 그런 고급스런 게임입니다. 물론 게임자체만으로도 많은 변화를 보여주지만 또하나 중요한 점은 한국의 게임산업도 큰 변화를 앞두고 있습니다. 스타크로 만들어진 게임방송과 프로게이머로 대표되는 이 신종산업도 이 분야도 자신들이 가져가겠다는 개발사 블리자드의 움직임으로 급격하고 움직이고 있죠.

그러나 아직 저같은 스타2의 초보유저, 그리고 스타1의 오래된 애호인에겐 아직은 배틀넷은 어색하고 일단은 혼자서 즐기는 캠페인을 깨가며 게임에 익숙해지고 있는 시간들입니다. 그런 대부분 사람들에겐 아무래도 캠페인, 즉  각종 미션을 깨며 게임에 익숙해지고 그 과정을 즐기는 1인용 플레이에 집중하게 되는데 요새 게임들 대부분이 그런 것처럼 이 스타2도 캠페인은 하나의 '이야기'형식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사실 스타1이 인기를 끈 요인은 물론 우리나라에선 배틀넷이라는 다수 게이머들의 경쟁과 놀이의 장을 만든 것 때문이었지만 외국게이머들에겐 테란과 프로토스, 저그 라는 세종족의 생존을 건 투쟁, 그리고 그 중심에 선 인물들의 이야기가 게임의 뼈대라는 이야기의 매력도 상당했습니다.

이번 스타2도 전작과 이어지는 이야기뼈대를 가지고 그것으로 미션들을 연결해 캠페인을 만들었습니다. 물론 많은 분들, 특히나 30대까지의 남성들이라면 스타크의 줄거리를 모르는 분은 없겠지만 이번 스타2의 이야기뼈대를 잠깐 얘기하자면 전작의 주인공 '레이너'가 폭압적인 지배자인 멩스크를 상대로 싸우며 혁명을 시도하다가 자신의 옛애인이자 멩스크에 의해 괴물종족 '저그'의 여왕이 된 '캐리건'을 다시 인간으로 돌려놓게 된다는 결말로 끝납니다. 물론 앞으로 확장판이라는 이름으로 후속판이 나와 이야기가 진행될 예정이지만 일단 이번 발매된 스타크래프트2 '자유의 날개'의 줄거리는 여기까지입니다.

이 이야기를 끝내기 위해 다른 게이머들처럼 26개의 미션을 깨고 끝을 본 저의 느낌은 뭐랄까 12년전 스타1보다는 이야기에 대한 몰입도가 떨어졌다는 게 솔직한 평가입니다. 마치 현란한 CG와 특수효과로 눈은 즐겁지만 내러티브는 약해진 요즘의 헐리웃 블럭버스터를 보는 느낌이랄까요.

해서 왜 그럴까 조금 생각해봤습니다.

짧은 단견이지만 결국 2가지로 생각되더군요. 하나는 기승전결로 이어지는 내러티브의 극적인 긴장도가 떨어진다는 거고, 둘째는 단선적인 스토리라인이 아니라 미션도중 선택을 통한 가지치기를 가능하게 한 결과 시도자체는 좋았지만 완결한 이야기로서의 몰입도는 떨어졌다는 겁니다.

스타2의 캠페인의 줄거리를 단적으로 요약하면 캐리건을 인간으로 돌려놓은 임무의 성공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그 중심사건인 캐리건의 인간화라는 임무는 26개 임무들 가운데 마지막 바로 직전 내지 그 앞 3,4번째에서야 제시됩니다. 결국 중심사건이 너무 뒤쪽에서야 정체를 드러내는 것이죠. 고전적인 헐리웃영화나 소설이었다면 아마도 이런식으로 전개됐을 겁니다.

<고전적인 내러티브형태로 봤을 때 적당했을 경우 '스타2'의 이야기구조>

기 : 주인공 레이너와 조연들 - 타이커스, 맷호너 등 - 등장, 레이너와 멩스크, 캐리건의 관계설명.
승: 레이너에게 캐리건을 인간으로 돌려놓을 수 있다는 과제 제시/ 과제수행 즉 캐리건의 인간화를 위해 필요한  유물모으기 수행
전 : 캐리건의 인간화와 유물모으기를 사주한 사람이 멩스크의 아들이라는 반전 등장. 이때문에 중심과제 수행여부를 놓고 레이너와 부하들 갈등.
결 :  갈등해결, 마지막 전투에서 승리, 결국 캐리건을 인간으로 돌려놓음.

이와 같은 기승전결 즉 갈등의 고조와 전환을 거쳐 결말로 이어져야 할 겁니다. 그런데 실제 스타2는 중심과제인 '캐리건의 인간화'의 존재는 스토리의 너무 후반에 등장하고 거꾸로 중심과제 수행을 위한 세부과제인 '유물모으기' 미션이 앞부분의 주된 내용입니다. 결국 유물이 왜 필요한 지도 모르면서 유저들은 이 유물모으기미션들을 깨야하니 몰입도가 떨어지는 겁니다.

<실제 스타2의 이야기구조>
기 : 주인공 레이너와 조연들 - 타이커스, 맷호너 등 - 등장, 레이너와 멩스크, 캐리건의 관계설명.
승: 유물모으기 수행 (유물을 팔아 돈을 모으기 위해서라는 당위성만 제시)
전 : 유물모으기를 사주한 사람이 멩스크의 아들이라는 반전 등장. 멩스크의 아들은 유물로 캐리건을 인간으로 만들수 있다고 설명. 캐리건을 인간으로 만드는 과제수행을 놓고  레이너와 부하들 갈등.
결 :  갈등해결, 마지막 전투에서 승리, 결국 캐리건을 인간으로 돌려놓음.

중심과제가 소개되고 그해결을 위해 노력하는 과정이 전개되고 그 최고조에서 하나의 반전이 나온뒤에 해결되는 극적과정이 있어야 하는데 중심과제의 존재가 반전부분에서 함께 나오니 극적인 감동을 느낄 사이가 없는 겁니다. 특히나 게임유저는 레이너와 동일화가 돼야 하는데 앞부분 미션들 상당수를 차지하는 '유물모으기'의 목적이 단지 돈때문이 돼서야 유저들이 주인공 레이너의 심정에 동조하긴 어렵습니다. 중심과제가 앞서 제시돼 "캐리건을 인간으로 돌려놓기"위해서 유물을 모은다는 설정이었다면 아마도 게임자의 마음가짐은 주인공에 더욱 잘 동화됐을 겁니다.

결국 스토리(인물들 등장해서 갈등해결하는 시간적인 순서)와 플롯(중심사건과 하위사건들의 배열)의 결합이 그다지 유기적이지 못한 것으로 저로선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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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하나는 선택미션들도 시도는 좋았으나 이야기 몰입에 방해가 됩니다. 미션을 깨다보면 다음과 같은 선택의 상황이 몇개 나옵니다. 위의 경우처럼 A라는 인물을 도울 것이냐 또는 B라는 인물을 도울 것이냐는 선택이 있고 또 미션들도 A행성의 미션을 먼저 수행할 것인가 B행성의 미션을 먼저 수행할 것 인가를 선택하는 과정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선택이 캐리건 구하기라는 중심과제엔 별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단지 하나의 작은 에피소드로 제한돼 버리죠. 또 어느 것을 선택하건 중심줄거리가 달라지지도 않고 이래선 선택의 의미가 너무 적습니다.

물론 시도자체는 신선한 것이지만 한번 선택해서 다깨본 사람 입장에선 '이거나 저거나'로 결론나니 단선적인 줄거리에 변화는 주는 효과는 없다는 것이죠.

내러티브라는 관점에서 스타2를 잠깐 들여다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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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16 13:39 2010/08/16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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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는 만화

Reading Culture 2010/03/26 22:00 주인장
어찌보면 좀 노골적이지만 나름 해학이 있는 만화네요.

특히나 마지막은 저로선 그냥 웃을 수 만은 없는 내용입니다. 조금만 민감한 내용이 있어도 보도하기기 쉽지는 않았고 간부들과 잦은 설전이 벌어졌던게 지난 2년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우리를 막다가 이번에 나가신 분들이 '좌빨'이었다니... 바로 그 너무나 보수적이고 체제안정적이었던 '좌빨'들 80퍼센트를 척결하신 분의 이야기를 듣는 건 우리에겐 너무나 초현실적인 경험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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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26 22:00 2010/03/26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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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제뉴스의 상당부분은 세계를 경영하는 미국에 대한 것이고 그래서 국제부기자도 미국사회의 주류시각과 현실에 대한 뉴스를 좋든 싫든 관심있게 봐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지금의 미국사회는 솔직히 걱정스러운 구석이 많습니다.

  지금 워싱턴 등 대도시에선 이른바 건강보험개혁 반대 'tea party'라는 시위가 한창입니다. 옛날 보스톤에서 영국이 차에 과도한 세금을 매긴데 항의해서 미국인들의 독립전쟁이 시작된 사건인 보스톤 티파티에서 따온 거죠. 건보개혁을 위한 세금 인상에 반대한다는 겁니다. 그런가하면 오바마 대통령의 의회연설때 'You lie'라고 외쳤던 조 윌슨 의원은 처음엔 비난을 받았지만 이내 극우보수층의 지지를 받으며 기세가 등등한 상황입니다.
  물론 개인적 견해지만 저로선 국민의 5천만명 가까이가 의료보험을 받지 못하는 상황을 개혁해보겠다는 대통령이 왜 이렇게 반대를 받아야하는지 이해가 안됩니다.
  아니 사실은 바로 부정해서 그렇지만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그 5천만명의 가운데 대부분이 흑인 등 유색인종이라고 생각하는 미국인이 많고 - 사실은 그렇지 않지만 - 그러다보니 이 문제는 엉뚱하게 인종문제로 이어졌죠. 그래서 백인 보수층이 흑인을 살찌우는 오바마 반대로 돌아섰고요.  (이런 인종문제는 우리의 지역감정에 대비시키면 이상하게도 잘 맞아떨어지기도 합니다.)
그리고 또 당장 세금이 많아질 것이란 공포도 큰 이유죠. 거기에 전 공화당 부통령 후보은 건보개혁이 이뤄지면 백인 노인들은 의료보험혜택을 받을 수 있는지를 각 지역의 의보위원회에 의해 결정받게 되는데 노인들의 혜택은 다 끊길 것이라고 선동하고 있죠. 이른바 '죽음의 위원회'라는 선동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건 폭스뉴스 등 보수매체의 선동입니다. 뭐 폭스는 스스로 시청자층이 MSNBC나 CNN을 합친 것보다 많다며 자신들이 '리버럴'한 매체라고 주장합니다. 이에 대해 미국의 지식인들은 폭스뉴스가 리버럴이면 미국 주류사회의 이념은 도대체 뭐냐 '공산주의'냐라고 비아냥거리긴 하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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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서 인용한 그림들은 CNN의 시사토크쇼에서 따온 것입니다. 물론 그래서 CNN의 시각도 반영돼 있지만 사실부분만 따왔습니다.


반대가 90퍼센트가 넘는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그 설문의 질문은 대개 이런 식입니다.

"당신은 건강보험 개혁을 위해서  세금을 더 많이 내는 것을 찬성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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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질문을 보시면 알겠지만 아예 전제가 되는 '건강보험 개혁'에 대한 얘기는 없고 밑도 끝도 없이 "Do we need a tax hike?" 즉 "세금 인상이 필요하냐"는 질문입니다. 밑도 끝도 없이 세금인상해야 겠냐고 물으면 모두 세금인상 싫다고 하겠죠. 좋다는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결과는 아래 같은 결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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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스는 8퍼센트, 반대는 92퍼센트입니다. 사실 이건 세금인상 반대에 응답이 92퍼센트라는 건데 폭스뉴스의 앵커 오라일리는 "건보개혁에 대한 반대가 92퍼센트"라고 말합니다. 세상에나!
 
  그런데 사실상 같은 질문에 대해 다른 답도 나옵니다. 이번엔 MSNBC의 설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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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씨가 작아서 안보이지만 "건강보험개혁을 위해 (소득)상위 1.2퍼센트의 미국인에게 세금을 더 부과하는 것이 정당하냐"라는 설문인데 94퍼센트가 찬성입니다. 사실 오바마의 건강보험개혁으로 세금이 느는 건 일반인이 아니라 주로 1.2퍼센트의 상위층입니다. 폭스는 교묘히 그 사실을 감추고 설문했지만 폭스뉴스나 NBC나 같은 질문을 한 셈입니다.
  그런데 폭스는 건보개혁 92퍼센트 반대라고 보도하고 MSNBC는 94퍼센트 찬성이라는 답이 나오는 겁니다. 같은 사안에 정반대의 답입니다. 역시 또한번 세상에나!!

  그런데 이런 폭스뉴스 설문엔 특이한 점이 있습니다. 아주 작게 적혀져 안보이지만 이 설문조사는 한 기업이 후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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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tionwide Insurance'. 네 바로 건보개혁이 이뤄지면 직격탄을 맞게되는 미국 최대의 민간 의료보험사입니다. 오바마의 건보개혁의 골자는 공공의료보험을 새로 만들자는 거고, 그렇게 되면 현재 비싼 의료보험료를 받고 있는 민간의료보험사는 타격을 입게되죠.
  그런데 이렇게 이해관계가 바로 걸려 있는 민간의료보험사가 폭스뉴스의 앞서 말한 '요상한 설문'을 후원했습니다. 오바마에게 '거짓말'이라고 고함쳤던 조 윌슨의원도 민간의료보험사로부터 거액의 정치후원금을 받고 있습니다. 참 객관적이고 공정한 방송사와 하원의원입니다!!!
 
  미국의 참 말도 안되는 상황, 특히나 폭스뉴스의 작태를 보고 있으면 그래도 하나는 위안이 됩니다.

"조선일보는 한국에만 있는 건 아니다! "

민주주의의 선진국이라는 미국의 이런 상황을 보면서 우리만 그런게 아니네 하는 위안을 얻는 걸 기뻐해야 할지, 타락한 자본과 대중매체의 결합에 의한 시청자들의 바보화가 전지구적 현상이라는 것을 새삼스레 깨달아야 할지는 저와 여러분의 선택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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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9/15 15:09 2009/09/15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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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N과 폭스뉴스

Reading Culture 2009/08/24 22:29 주인장

2주전 CNN 아시아본부의 'News Source' 고객서비스 담당자가 국제부를 찾아왔습니다.
키가 무척이나 큰 중국계 여성이었는데 유창한 영어로 - 당연하죠, 미국인인데...- 자신들이 해 줄 수 있는 각종 서비스를 상세히 설명하고 앞으론 뉴스소스를 인터넷으로도 전송하게 됐다며 이용법을 아주 친절히 설명해줬습니다.

뉴스소스는 쉽게 말해 자막없는 CNN뉴스 아이템들입니다. 영상만 들어오기 때문에 그 화면을 다시 가공해 뉴스로 만들수 있고 당연히 이용료를 내고 있는 방송사들에게 전송해주고 있습니다. 고객에 대한 판매회사의 애프터서비스 방문이었던 셈인데요. 그러나 이런 친절은 전례가 없는 일이어서 조금은 어리둥절하게 만들었습니다. 아마도 최근 경기침체속에서 가맹사들의 감소가 있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그외에도 CNN은 최근 시청자나 영향력이 전성기에 비해 많이 줄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그 원인은 바로 폭스뉴스(Foxnews)의 급성장때문입니다. 폭스뉴스가 얼마전 AC닐슨의 통계를 인용해 보도한 시청률에 따르면 지난 4-6월의 2.4분기 프라임 타임대 시청률이 폭스 뉴스는 248만4천여명, MSNBC는 94만6천명 그리고 CNN은 93만9천명으로 나타났습니다. 물론 CNN은 이에 발끈해서 같은 기간의 누적 시청자수는 자신들이 1위라고 반박했지만 이미 시청률 1위는 폭스뉴스로 넘어갔다는건 정설인 듯 싶습니다.

아시다시피 폭스뉴스는 보수성향의 방송이고 그에 비하면 MSNBC나 CNN은 진보적 - 상대적으로요...- 입니다. 이런 성향과 상관없이 폭스뉴스가 뉴스를 더 잘 만들어서 많이 보게 된 거고, 다른 방송은 잘 못 만들어서 그런 거면 상관없는데 한국도 마찬가지지만 뉴스의 시청률 변화는 그런 뉴스완성도보다는 다른 이유로 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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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utfoxed'라는 다큐멘터리까지 만들어졌고 이 내용은 MBC에서도 소개했지만 - 관련기사 
폭스뉴스는 보수적이면서 보수적이기만 한게 아니라 뉴스문법도 바꿨습니다.  다른 뉴스들이 애매하고 중립적인 멘트와 사실위주의 보도를 하는데 비해 뉴스 진행자 오라일리부터 시작해 뉴스자체가 상당히 직설적이고 '확실'합니다. 오라일리는 "미군의 이라크침공을 지지하지 않을 거면 입을 닥치라'라고 일갈할 정도죠.
 
  그에 비하면 CNN이나 MSNBC는 정통 저널리즘에 충실하며 리버럴합니다. CNN의 종군취재전문기자인 크리스티 아만포는 이라크와 아프간의 전장을 누비며 '미국은 우리의 적'이라고 말하는 아랍 젊은이들을 인터뷰하고 이들을 이렇게 만든 건 이들의 고향을 전장으로 만들고 무고한 민간인들까지 무인공격기로 학살한 미국의 자업자득이라는 걸 가감없이 전달합니다.
  심지어 얼마전엔 아프리카 특파원이 다국적기업에 맞서다 죽음을 당한 나이지리아의 유명한 시민운동가 켄 사로위와의 삶을 집중조명한 리포트를 반복해서 내보내더군요. 만약 MBC가 그랬다면 공정방송 어쩌고 하는 단체와 군복입은 분들이 몰려와 '좌빨방송' 물러가라고 했겠지만 그분들은 절대 CNN에 대해선 그런 항의를 하진 않을 겁니다.

  CNN의 캐치프레이즈는 'Impact your world'입니다. 뉴스를 통해 세계를 변화시키자는 거죠. 그리고 이 캐치프레이즈를 보여주는 광고를 매일 내보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가지 중요한건 단순히 자신들이 프로퍼갠더가 돼서 일방적으로 주장하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들은 변화의 재료를 던져줄테니 그걸 시청자가 맘껏 이용해서 세계를 진보시키라는 겁니다. 그래서 캐치프레이즈 광고에서도 중요이슈들에 대한 각종 데이타는 인터넷 홈페이지에 올려놨으니 그걸 보고 '세계를 이해하고 변화 좀 시켜봐라'라고 광고합니다. 이 광고는 한번 보실 필요가 있는데 광고말미에 다양한 국적을 가진 CNN 자사 기자들이 나와 자국어로 이 캐치프레이즈를 외칩니다. 그래서 중간에 한국계 기자도 나와서 어눌한 발음으로 "세계를 변화시키자"라고 외치는 우리말을 CNN에서 매일 들을 수 있습니다. 이런 정신은 창립자 테드터너의 철학이기도 합니다.

  이에 비하면 폭스의 창립자 루퍼트 머독은 자본의 이해에 충실하고 언제나 자신이 진출한 나라의 보수정당의 이념에 항상 맞춰서 사업을 해온 기업가입니다. 그래서 1996년에 출범한 폭스뉴스는 그 시작때부터 공화당의 이념에 충실했고 부시행정부출범이후론 항상 부시의 정책을 충실히 뒷받침했습니다.

  우리 방통위의 최시중위원장께서도 미디어법 통과를 위해 애쓰던 바쁜 와중에 미국을 방문해 루퍼트 머독을 만나 여러가지로 조언을 구하고 오셨습니다. 방송진출에 대해 우리 대기업이 열기를 안 보이자 그 돌파구를 찾기 위해 해외 미디어재벌의 진출까지 염두에 둔 행보를 한 것으로 보이는데요. 뭐 어쨌든 두 분의 회동은 너무나 잘 어울리는 한쌍의 만남이란 생각이 듭니다.

  어두운 현실을 고발하고 변화를 촉구하는 골치아픈 뉴스를 외면하고, 단순하고 보수적인 뉴스를 좋아하는 건 우리나라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전문직, 고학력, 도시근로자, 이민계층에선 휠씬 우세한 CNN이  저학력층, 저소득층, 백인, 노인층, 보수적 고소득층에서 압도적인 폭스뉴스에 밀리는 현실은 너무나도 정확히 우리에겐 이미 오래전에 반복돼온 현실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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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8/24 22:29 2009/08/24 2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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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은  제가 대학원 재학시절 석사논문을 쓰면서 발견한 자료를 번역한 것으로 'Critical Studies In Mass Communication' 이라는 비판 또는 문화연구 분야의 가장 저명한 저널 중 하나에 실렸던 글입니다. 이제 종료해버린 아쉬운 그 미니시리즈 엑스파일을 둘러싼 문화현상에 접근하는 법을 보여주는 글이죠. 쉬우면서도 이런 종류의 티비시리즈가 어떤 거고 어떻게 생각하며 봐야할지 보여주는 좋은 글입니다.

   이번에 X파일 극장판이 개봉했죠. 한때 제가 빠졌던 티비시리즈이고  제게 텍스트와 그 사회적 의미에 대해 많은 아이디어와 상념들을 줬고 결국 석사논문의 소재가 됐던 'X파일' 인지라 반갑기 그지 없습니다. 뭐 작품성은 그다지 좋지 못하다는 평이 있지만 그래도 다시 한번 나와준 것으로도 참 고맙네요
.


Critical Studies in Mass Communication
16(1999),
136-154

"The Strange Discourse of The X-files: What it is, What it does, and What is at stake"

    wrtten by  Joe Bellon

  여기서 작가는 선행장르들과의 연관을 통해 이 프로그램의 인기에 대한 분석을 시작한다. 먼저 엑파가 사이언스 픽션이라는 것은 부정되고 오히려 존재론적 탐정 스토리장르로 간주된다. 이런 배경 하에서 작가는 이 작품이 권위를 해체하며 동시에 재구성해내는 방식을 설명하고 있다. 과학, 정부, 성의 세 가지 주요한 영역에서, 엑파는 전통적 경계나 정의에 물음을 던지는 이야기를 창출하기 위해서 친숙한 캐릭터와 내러티브를 이용한다. 작가의 결론은 이 작품에 의해 창조된 시각은 현대사회의 성원들로 하여금 다양한 귄위들에 대한 관심들에 직면하게 하고, 그것들을 waking consciousness로 묶어내는 기회를 주기 때문에 전복적이면서 잠재적으로 해방적인 성격을 가진다는 것이다.

  엑파는 이제껏 있었던 가장 기이한 텔레비전 프로그램들 하나이다. 섹스나 총싸움, 코미디가 없다. 그리고 이것은 외계인이 날아와 인간에게 실험을 하고 있으리라는 황당한(?) 생각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돌아간다. 그런 가운데서 이 프로그램은 일관되게 톱 12에 드는 폭스의 효자 프로그램이다. 단순한 인기 외에도 대중들에게 ‘음모’라는 요소를 상기시켰고, CNN의 Larry King쇼 같은 대중매체에서 로스웰의 UFO충돌사고에 대해 다루도록 만들었다. 점차 엑파는 대중문화를 반영함과 동시에 만들고 있다. 이 쇼는 워싱턴의 FBI본부를 새로운 관광문화의 중심지로 만들고 있다.
  여기서는 필자는 엑파는 사이언스 픽션이 아니라 일종의 존재론적 내러티브임을 주장한다. 이러한 장르 배경 하에서 전반부 두개의 시즌의 에피소드들을 통해서 엑파가 권위에 대한 지배적 태도를 기호학적 및 장르적으로 해체하고 있음을 보여주고자 한다.


  선행장르에 대한 질문


  장르는 여전히 중요한 문제이고 관심사다. 장르의 중요성은 그 프로그램의 질에 대한 평가를 넘어서서 시청자가 기본적 이해를 돕는 장치로서 자리한다. 어떻게 읽어야 할 것인가가 장르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장르연구의 성과를 이용할 수 있는 전문가에게도 마찬가지다.(Textual 분석) 장르는 독해에 있어서 역사적 맥락를 제공할 뿐 아니라 장르를 형성시키는 레토릭한 형태들은 지각된 상황요구에 대한 스타일적이고 실재적인 반응인 것이다.
  엑파는 흔히 사이언스 픽션으로 분류된다. - Daily Variety, 워싱턴 타임즈 등
  그렇다면 사이언스 픽션장르란 어떤 것인가? 먼저 가장 중심적인 특징은 그 시청자들에게 이곳에 혹은 최소한 현재 있지 않은 것에 대한 리얼리티를 준다는 것이다. Broderick은 이것은 과학적으로 철저한 다른 텍스트에서는 ‘anomaly'로 여겨질 것으로, 이 극적인 비연속성이 스토리를 픽션에서 사이언스픽션으로 바꾸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 불신에 대한 의도적 유지는 이 장르의 숨겨진 선행조건이다. 이것은 내러티브의 시작점에 앞서 존재하며, 독자와 작가사이의 합의의 하나이다. 텔레비전 장르로 사이언스 픽션을 말할때 Siegel(1985)은 스타트렉과 같은 작품들은 소설형태일때 보다 플롯요소들에 있어 휠씬  덜 신빙성을 갖게된다고 보았다. 이런 관점에서 사이언스 픽션 TV프로는 그러한 요소들이 사실적이라는 확신을 갖게 하려는 시도없이 이상(異常)한 요소들을 제시한다.
  SF가 그 이상한 장치들에 합법성을 부여하려고 시도할 때 그것은 오늘날 확립된 과학적 개념들 하에서 가능해진다. 이러한 장르적 특성은 Wendland(1985)에 의해 잘 묘사되고 있다.
  “SF의 동의된 공통적 리얼리티의 기저에 자리잡고 있는 존재론적 배경은 현재 통용되는 과학적 법칙이다. 최소한 지금은 아니어도 미래에는 이해될 수 있으며, 객관적이고, 변하지 않는다는  전제이다. ...”
 비록 SF내러티브가 일탈성을 제시한다하더라도, 과학적 논증을 통해 이러한 불연속성은 정당화된다.
 -> 필자는 여기서 이러한 SF의 1) anomaly 와 2) scientific law에 주목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러한 두가지 SF장르의 특성이 엑파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더우기 엑파는 그 등장인물과 사건들을 극적으로 異常한 것이나 혹은 과학적으로 인정되는 것, 어느 한쪽으로 나타내기를 거부한다.
(SF는 사실 같지 않은 이상한 현상을 제시한 후 그 일탈성을 과학적 법칙에 의해 정당화하는 수순을 밟는데 엑파는 그렇지 않다는 것.)


Deny Science, Deny Anomaly


  엑파의 줄거리(여기서는 1-2시즌)을 잠깐 보아도 이 작품에서 보이는 전통적 과학의 거부는 명확해진다. 멀더는 우리사이에 존재하는 외계인이나 그외 초자연적 현상을 쉽게 받아들이고 이것은 그가 12살 때 여동생이 외계인에게 납치된 경험에서 비롯된다. 과학의 권위를 무시하는 ‘The Skeptical Inquirer'는 엑스파일을 통해 공공연히 ’진리는 휴가중‘이라고 선전하고 있으며 ’초과학적 현상에 대한 과학적 검증 위원회나 건전 미디어를 위한 위원회 등은 엑스파일이 과학에 대한 잘못된 인식과 불신을 심고 있는 위험한 프로그램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만일 엑스파일이 전통적 과학을 거부한다면 아마도 그것은 시청자들에게 SF에서 말하는 비현실적이고 비이성적인 특이(anomaly)를 제공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처음부터 이 시리즈는 자신이 묘사하는 사건들이 사실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예를 들어 에피소드 ‘Pilot'의 도입부에서 우리는 다음의 이야기는 실재문서에 기초한 것이라는 메시지를 부여받는다.
  즉 크리스 카터와 그의 작가들은 엑파의 이야기를 현재, 실재의 일로써 제시하고 있다. 더욱이 카터는 엑파를 그것에 영향을 주었을 환상적 이야기들과 구별하려고 노력해왔다. 그는 ‘이 프로그램을 기존의 SF류와는 거리를 두고자하는 것이 나의 현재 신념이다. 가능성의 극단과 불가능한 것은 구별된다. 즉 이 작품은 비록 극단적일지라도 가능성의 영역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내 지론이다’라고 말했다.
  결국 우리는 엑스파일의 어떠한 부분이 흔히 SF에서 말하는 극적인 특이로 불리 수 있는지를 질문해야 한다. 아마도 외계인, 돌연변이, 괴물, 그리고 초자연적 현상에 대한 묘사가 그것에 해당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을 특이한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그들 존재의 극단적 가능성을 부정하는 즉 그들이 존재함을 부정하는 것이 된다. 이것은 엑스파일이 주장하려고 하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극단적인 가능성에 대한 믿음의 유효성에 대한 멀더와 스컬리 사이의 계속되는 논쟁은, 어떤 특정 기관이 그 존재를 부정했기 때문에 또는 그것이 전에 나타난 적이 없는 일이라고 그 비상식적인 일들을 배제할 수는 없다는 주장을 표현한다. 엑파 파일이 SF라는 것을 지지하는 것은 단지 그 존재 혹은 가능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엑파가 SF라고 본다면, 엑파의 기이한 사건들의 가능성이라는 것이 너무나 비현실적이어서 시청자에게 그것들이 단지 극적인 특이임을 느끼게 해 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멀더의 지각에 의해서 밝혀지는 예기치 못한 주어지는 결론은 그러한 암시들이 증명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이게 한다. 예를 들어 내가 이 글을 쓸 당시는 4시즌이 막 끝난 참이었다. 스컬리는 멀더가 발견했다는 외계인들이 정부가 창조한 가짜라는 증거를 밝혀내게 된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가 이 프로그램을 통해서 논의했던 시각들은 모두 바뀌어야 하는가? 만약 우리가 이 프로그램을 SF라고 분류했다면 그러할 것이다. 우리는 이 프로그램을 단지 의심과 가능성이 존재하는 특이라고 정의할 수는 없다. 이 프로그램이 그자체로 사건들의 존재에 대한 리얼리티의 명확한 해답을 제시하지 않는다고 해서 엑스파일이 의식적으로 격리된 프로그램으로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장르의 역할


  만약 엑스파일이 전통적 의미의 SF에 속하지 않는다면, 어떤 장르에 넣어야 할까? 혹자는 현재의 문학전통에서 볼 때 엑스파일은 일종의 탐정 프로를 닮았다고 주장한다. Wilcox와 Wiliams가 쓴 이 시리즈에서의 젠더에 관한 탁월한 글에서 이 프로그램과 코난도일의 홈즈 시리즈와의 근거있는 공통점들이 제시되었다. 물론 엑스파일과 전통적인 탐정스토리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윌콕스와 윌리엄스는 멀더의 논리적 추리능력에 주의하지만 그러나 그는 지식의 추구에 있어 색다른 자기만의 방식을 택하고, 아이디어의 도출에 있어서도 비이성적이고 타자/여성적인 것을 택하곤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스컬리도 왓슨의 전형적인 재현과는 거리가 멀다. 그녀는 자신의 뛰어난 추리력에서 주목할 만하며 그점에서 왓슨과 많은 차이를 드러낸다. 더욱이 윌콕스와 윌리엄스가 두 주인공의 성적 역할 한계로 지적하는 것은 전형적인 탐정 스토리에서 존재하는 것보다 휠씬 더 많은 수사, 설명, 관계의 양식 사이에서의 상호작용을 허용하고 있다. 결국 엑스파일은 트윈픽스시리즈에 대해 Hague가 말했던 것과 같이 비선형적이고 비인과적인 직관과 유사한 지식 추구 경향을 보여준다. 물론 그 두 시리즈간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지만, 멀더의 직관에의 의존과 스컬리의 종교적 믿음에의 의탁은 탐정스토리로의 분류를 문제시하게 만든다.
  그래서 엑스파일을 탐정 스토리라 부르는 것은 오류일지도 모르지만, Elana Gomel은 좀더 적합한 다른 탐정장르의 윤곽을 제시해 준다.

  “내가 존재론적 탐정 스토리라 부르고자 하는 프로그램은 상황이 발생하는 장소자체가 조사의 대상이며, 풀려져야할 미스터리 및 비밀이 되고 있는 텍스트로 구성된다. 이러한 프로그램은 범죄의 수수께끼가 텍스트의 주제적이고 구조적인 초점으로 기능하며, 플롯이 범죄자의 행위를 따라가는 고전적인 탐정 스토리와 많은 형식적 유사성을 보인다. 그러나 내가 아는 한 SF의 양태에 비추어보면 탐정소설 안에서 시체를 통해 기인하는 모든 미스터리하고 해악적인 에너지의 원천은 학문적 세계의 존재라기 보다는 실재 상황이 일어나고 있는 세상의 실체이다. 답해져야할 문제는 누가 그것을 저질렀냐?가 아니라 이것이 무엇이냐?이다. 죽음의 비밀은 존재의 비밀로 대체된다.”

  이러한 설명은 한가지 예외를 제외하고는 탐정 장르보다는 엑파의 특성에 더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Gomel은 SF안에서 이러한 존재론적 탐정 스토리의 존재를 주목한 것지만, 반드시 존재론적 탐정 스토리가 SF의 맥락에서 일어날 필요는 없다.
  엑스파일은 우리가 외계인과 괴물, 정부, 우리의 가족, 그리고 우리 자신에 대해 확실히 확신을 갖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면서 이와 같은 존재론적 물음을 내부화하며 재창조한다. 우리가 우리에게 극히 친숙한 현실의 세계에 대한 근본적인 의심을 던지는 것이 불가능할까? 멀더요원을 확실히 그렇다고 생각하고 있다. 마침내 엑스파일은 누가 그것을 했는가?에 대해 질문하지 않는다. 스컬리와 멀더는 많은 미스터리에서 담배피는 사람의 연루를 인식하게 된다. 권력협회의 일원으로서 그의 지위는 범죄자로서의 정체성과는 거리가 있다.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엑스파일사건을 낳는 현실은 무엇인지 알아내는 것이 스컬리와 멀더에게는 더욱 중요하다. 따라서 멀더의 모토는 나는 이 범죄자들을 막아야한다가 아니라 ‘나는 알아야 한다’(I have to know)가 되는 것이다.       
  Gomel의 논의는 계속해서 보다 유용한 유사성을 제시해 준다. 첫째는 Gomel은 이러한 장르(존재론적 탐정이야기)에서 존재론적 질문은 범죄를 통해 형성된다는 것을 강조한다. - 미스터리세계는 결국 어둠, 폭력, 악의 세계이며, 계시를 행하고 뒤이어 유토피아적인 변화를 낳게 된다. 여기서 이러한 변화의 도래는 중요한 비밀의 폭로를 통해 단언되어진다.
  더욱이 멀더와 스컬리는 정부에 의한 악행을 계속적으로 폭로하고 주지시킨다. 담배피는 사람과 같은 인물들은 스컬리와 멀더가 그들의 활동을 폭로할 수 있을 때까지는 계속 현실 왜곡의 범죄를 저지를 것이다. 결국 미스터리는 범죄로서 나타나고 미지의 사실은 단지 설명되어야 할 뿐 아니라 폭로되어야 할 대상이 된다. 이런 관점에서 미스터리의 해결은 비밀화된 세계 자체를 변화시키는 것이 되고, 비밀이 궁극적인 범죄였던 것으로 묘사된다. 

  존재론적 탐정 스토리에서는 질서의 문제는 세계의 구조의 차원으로 치환된다. 비밀은 현실의 결함과 같다. 이렇게 해서 궁극적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바는 범죄행위에 의해 표현되는 사회적 질서의 지엽적인 혼란이 아니라 역사자체의 무질서함이 되는 것이다.

  계시론적(apocalyptic)이고 유토피아적 사건의 발생은 엑파에서도 두드러진다. 멀더에게 있어 진실을 알아내는 것은 모든 악행에 대한 최상의 치유이다. 만약 그가 진실을 알아낼 수 있다면 그의 여동생은 구출될 수 있을 것이며, 세계는 무엇이 진실인지를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그 권력집단에서부터 자유로와 질 수 있다. 그 유토피아적인 발견의 순간은 에피소드 ‘Colony'에서 묘사되고 있다.
  “만약 내가 지금 죽는다며, 그것은 내 믿음이 사실이었이 확실해지는 것이며, 만약 죽음을 통해 더 큰 미스터리들이 밝혀진다면, 나를 여기까지 끌고 온 의문들에 대한 답을 알게 되는 것이다.”(멀더의 대사래네요. 사실 이 에피소드를 보지 못해서...아 보고 싶어라...)
  그러나 다른 등장인물들은 멀더에게 진실의 폭로는 결국은 계시(apocalypse)의 결과를 낳게 되고 말거라는 것을 확신시키고자 노력한다.(성경에 대한 지식이 없어서 잘 의미를 파악하기 힘듭니다만 아마도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세상의 종말을 은유해서, 진실의 폭로는 결국 세상을 파멸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말이 아닌가 생각되네요. 다시말해 ‘알려고 하지마 다쳐’를 어렵게 말한 것이 아닌가하고 생각이 드는데 다른 의견이 있으시면 덧붙이세요.)
  특히 담배맨은 세상은 그가 가지고 있는 진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음을 여러차례 강조한다. 심지어 멀더가 신뢰했던 Deep Throat도 진실의 폭로에 대해 경고한다.
  Gomel이 존재론적 탐정 스토리의 특징으로 본 수사양식은 엑스파일에서도 드러난다. 존재론적 탐정 스토리에서 세상은 단지 가시적인 것이 될 뿐아니라, 그렇게 만들어지며 불명확성이 사라지면서 명확한 인식의 영역으로 들어가게 된다. 결국 이것은 탐정의 활동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과정에서 수사는 전통적인 규범과 범주에도 의심을 던지게 된다.
  다시 말해 전통적인 탐정 스톨리는 어떤 인물이 살인자일지 모른다는 가정에 의해 작동된다면, 존재론적 탐정 스토리는 어떤 것이 사실인가의 의심과 가정에서 작동된다는 것이다. 스컬리와 멀더도 이러한 방식을 따른다.
  존재론적 탐정 스토리라는 장르적 특성은 엑파의 이해에 많은 도움을 준다. 이 장르에서 탐정의 수사의 종결에 내재하는 계시적/유토피아적인 종말이 종말로서 실재 일어나지는 않는다. 대개 계시의 결과는 환상이 되고, 그러한 파멸의 끝에서 새로운 격변을 통해 새 세계가 펼쳐지고 결국 이야기는 다시 계속된다. 멀더와 스컬 리가 설사 진실을 결국 밝혀낸다해도, 우리는 새로운 비밀과 음모를 포함한 후속편이 계속될 것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Opening up to extreme possibilities


  존재론적 탐정이야기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우선 권위에 대한 개념이 변하게 된다. 첫째 엑파에서는 과학의 권위가 의문시된다. 그런데 엑파가 반 과학적이라면, 그 모토 ‘진실은 저 너머에 있다’는 어떻게 설명되어야 하는가? 더욱이 이 말은 결국 진실에 접근할 수 없다는 뜻으로서 존재론적 탐정 스토리의 장르특성과는 맞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아마도 이러한 어려움은 비과학을 넓은 의미에서 비이성과 같은 것으로 해석하는 경향에서 비롯하는 것으로 보인다.
  'Politics, Philosophy, Culture‘에서 미셀 푸코는 다음과 같이 이런 문제를 말한다. 푸코에 있어서 어떤 합리성도 실제는 이성적인 것이 아니다. (푸코에게 있어서 이성의 이름하에 인간이 만든 모든 합리성의 산물들은 실제로는 그러한 합리의 근거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는 권력과 연결되어 다른 사실들을 배제시키고 자신은 확고히 해온 역사의 산물일 뿐이라는 겁니다.지금까지 이성의 이름으로 비이성을 배제해 왔지만 실제 역사에서는 지금 비이성의 영역이었던 것이 오히려 주류였던 시기도 있었고, 권력과 연결이 사실은 이러한 변화와 지식이라는 산물을 만든 힘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이 어떤 것을 합리화할때의 주된 문제는 그들이 합리성의 법칙에 적합한가가 아니라 어떤 종류의 합리성을 사용하고 있는가를 알아내는 것이다. 주어진 어떤 합리성의 형태도 이성적이지 않다. 그렇다면 어떤 기존의 과학적 방법이나 이론도 실제로는 “과학”이 아닌 것이다. 엑파에서도 마찬가지다. 엑파에서 종종 비판하는 대상은 과학 자체가 아니라 권위자들이 무엇을 사실로서 만들기 위해 특정한 과학자들, 혹은 이론에 절대적 권리를 부여하는 방식인 것이다. 이것은 또한 멀더와 스컬리사이의 상호작용을 통해 보여진다. ’Pilot'에서 스컬리는 전문 과학적 소양을 갖춘 요원으로서 멀더의 의문스런 진리탐사 활동을 감시하기 위해 FBI에 의해 배치된다. 그녀는 객관적, 전문적, 전통적인 과학자를 표상한다. 내러티브상 그녀의 역할도 멀더의 행동을 바로잡고 과학의 권위를 다시 세우는 것이 된다. 그러나 멀더와 스컬리가 오레곤으로 10대들의 미스터리한 죽음을 조사하기 위해 갔을 때, 그들은 희생자의 관하나에 원숭이처럼 돌연변이된 사체가 놓여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도대체 이것이 무엇이고 이 사체의 두개골의 구멍에 들어있는 금속기구는 또 무언가? 여기서 스컬리는 이 미스터리에 대해 답할 수 없게 된다. 한편 멀더는 그보다는 휠씬 성공적이다. 그는 희생자들 사이의 연관을 알아내고, 궁극적으로 살인자를 직관적으로 알아낸다.
  이것은 전형적인 과학적 내러티브는 당연히 아니지만, 그렇다고 전적으로 비이성적인 이야기도 아니다. 멀더는 이 사건의 해결에 만족하지 않고 스컬리는 그녀가 검시중 발견한 미스터리한 금속체의 존재를 의문시한다. 양 캐릭터는 사건들에 대한 어떠한 근거도 없음은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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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8/16 23:27 2008/08/16 2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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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글은 제가 1998년(참 옛날이네요.) 대학원 재학시절에 이른바 'New Man'현상을 다룬 논문을 요약했던 글입니다. 남성도 관음의 대상이 되기 시작하던 그당시로선 새로운 현상이 나타난 이유를 설명한 글입니다. 사실 지금 관점에서 봐도 흥미로운 지적들도 있습니다. 물론 옛날 글이긴 하지만...

남성이 예전 여성의 위치와 같은 눈요기감 혹은 수동적인 대상이 된 광고들이 유행한 적이 있었죠. 고소영이 남성의 엉덩이를 치는 모 카드 회사 광고라든가, 꽃미남들이 등장해 여성들에게 한 번 봐주세요를 연발하는 광고들...

  사실 이런 현상은 'New Man'이란 이름 아래 미국이나 유럽에선 90년대 초반에 상당히 유행했던 일입니다. 이글은 아니고 바로 그런 현상을 분석한 션 닉슨이란  문화연구가들의 글을 제가 요약번역한 겁니다.  뉴맨현상을  1)‘Street style'  2) ‘Italian-American' 3) ‘Conservative Englishness' 등 세가지 부류로 나누어 그 각각의 행태와 의미를 분석하고 있습니다. 당시 유행한 리바이스 청바지 광고 등 재밌는 예들도 많습니다...

Exhibiting Masculinity     

                                                      Sean Nixon                                


1. 서두


  요사이 광고 및 문화연구는 남성성을 보는 눈이 달라졌음을 지적하고 있다. 예를 들어 리바이스 501광고 등을 보면 남성이 수동적인 위치에서 그 육체가 관음의 대상이 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런 현상은 80년대 중반 두드러져서 각종 잡지 등에서 육체를 물신화된 모습으로 내보이고 있는 남성이 하나의 유행처럼 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이미지들의 등장은 소비시장의 변화와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남성의류, 화장품, 잡지 등의 성장은 남성제품들에 새로운 디자인을 요구했고, 여기서 새로운 남성성의 버전 업으로  ‘new man'이 나타난 것이다.

  여기서는 이러한 새로운 남성성이 등장하게된 시장적 배경과 그 문화적 의미를 살펴보겠다. 이를 위해 남성의 패션 및 라이프스타일 잡지의 패션 면을 살피겠다.

  이 글의 분석은 다음의 목표아래 전개된다.


성정체성은 단일하고 고정되기보다는 사회, 역사적 변이에 영향받음.

남성에 의해 체험되는, 남성성의 특징을 형성하는 표상체계의 역할을 분석

시각적 표상을 분석함에 있어 푸코의 담화 개념의 유용성을 전개.

‘뉴맨’ 이미지들 안에서 기호화된 남성성의 형태가 가지는 의미를 독해..

시각적 표상들이 소비자에 대해 가지는 효과를 개념화하는데 푸코와 정신분석학적 접근사이의 논쟁을 살핌.

‘뉴맨’이미지들과 연관된 응시의 형태를 역사적으로 파악.



2. 남성성의 개념화


  먼저 남성의 힘에 대한 분석과 남성성에 내재된 지배적, 배타적 힘에 대한 문제틀을 설정하고 있는 페미니즘 저술들을 보겠다. 이들은 70년대부터의 여성차별 반대운동과 같은 성정치의 움직임에 영향받은 것들이었다.

  ‘The Sexuality of Men'과 같은 초기 저작들은 남성성을 호전성, 경쟁성, 냉정성, 통찰력 있는 성이라는 강조 등과 같은 특징을 가지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론 남성성은 남성들 자신에게 그러한 남성성을 과시해야 한다는 부담감으로 작용하기도 한다는 것도 지적되었다. 그런 와중에서 여성에 대한 남성의 우월성이라는 개념은 공통되는 것이었다.


2.1. 다원적 남성성

  최근의 저작들이 문제시하고 있는 것은 남성성 개념의 단일성과 남성성의 부담감에 대한 강조이다. 먼저 남성성은 역사적으로 규정되어 온 것이라는 것이 말해졌고, 이어서는 계급과 인종, 세대의 역할도 지적되고 있다. 즉 여타 사회적인 변수들과의 접목을 통해 남성성은 나타나게 되는 것으로 이것은 앞에서 제기한 뉴맨의 개념파악에 있어서도 공통된다.


2.2. 상대적으로 생각하기


  남성성의 파악은 그 자체로서만이 아니라 전체 성관계라는 지형 즉 여성성의 고려를 통해서 가능한 것이다.

  Davidoff & Hall의 ‘Family Fortunes'는 중산층의 남성성은 노동자 계급 및 귀족계급의 그것과의 대립 뿐 아니라 중산층의 문화 내에서 성 차이에 대한 강조를 통해 형성된 것임을 밝히고 있다. 이러한 중산계급의 남성성은 또한 일련의 공식적, 비공식적 기관들을 통해 강화된다. 예를 들어 채플 등의 기독교 의식과 행사는 기독교적 인성을 통해 남성성은 나타내어지기도 했다. 약자에 대한 동정과 검소한 옷차림 등의 덕목은 귀족계급과의 구별은 물론 여성들과의 거리 두기로서도 작용한다.


  18세기와 19초기 초의 중산계급 가정의 탄생도 중산계급 남성성의 또 다른 결정요인이었다. 최초로 공적 사회와 가정은 완전히 분리되었고, 이 기본적 단위를 책임지는 이는 바로 여성이었다. 즉 이러한 사회와 가정의 경계는 또한 성의 경계가 되었던 것이다. 이때 남성성의 중심은 가족을 부양할 수 있다는 능력과 독립성이었는데 이것은 당시 영연방의 중심으로서 영국민족성과 접목되어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러한 남성과 여성간의 역관계는 남성의 우위였다. 그러나 이것을 흔히 그렇듯 가부장제라는 틀로 볼 경우 우리는 여러 남성 여성집단간의 다양한 역관계와 그것의 역사적 양상을 볼 수 없게 된다. 말하자면 남성성 내에도 존재하는 지배적 / 종속적, 반항적 형태의 다양한 양식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2.3. Invented Categories

 

  근래의 사회학적, 역사적, 문화주의적 저작들의 성과를 종합해 보면 남성성도 다른 주체성들과 마찬가지로 일종의 ‘발명된 범주’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고는 주체의 비실재성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도 남성성이 구성된 방식에 대한 접근을 통해 그 문화적 의미를 파악하고자 한다.



2.4. 요약


1)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남성성의 다양성은 이제 우리로 하여금 뉴맨이라는 남성성의 한 양식의 개별적 특성에 대한 주의로 이끈다. 즉 어떠한 특성들이 서로 다른 시대에 존재하는 다른 종류의 남성성들을 구별짓게 하는지를 살피자.

2) 남성과 여성사이는 물론 남성성간의 권력관계가 존재한다. 그렇다면 뉴맨은 기존의 남성성사이에서 어떤 위치를 가지는가? 기존에 대한 반항인가 그것의 강화인가?

3) 성관계의 넓은 영역 속에서 남성성의 개별적 양상들을 위치시킬 필요를 이미 말했다. 그러면 여성성과의 관계에서 뉴맨의 위치는 어떠한 것인가?



3. 담화와 표상


  이후의 내용들을 관통하는 시각은 언어는 의미가 생산되는 구조화된 체계라는 점이다. 즉 표상에 대한 구성주의적 시각을 택할 것이다. 이러한 시각은 이미 소쉬르를 거쳐 바르트에게로 이어진 흐름인데 그 가운데서도 새로운 접근법을 마련한 바 있다.



3.1. 담화, 권력/지식과 주체


  우리는 이미 1장에서 소쉬르가 제안한 언어에 대한 보편적 분석이 푸코에 의해서는 주어진 역사적 순간에 말해지고 지식화되는 것을 형성하고 제어하는 규칙과 관습에 대한 분석으로 변한 것을 본 바 있다. 푸코는 담화 혹은 담화구성체를 특정의 주제나 대상을 표상하는 방식을 제공하는 일련의 진술을 말하기 위해 사용했다. 푸코의 후기저작에서는 담화가 특정 종류의 표상과 지식을 가능하게 하는 방식에 대한 주의가 담화구성체가 작동하는 제도 및 기구에 대한 보다 큰 관심으로 이어지고 있다. 여기서 푸코의 주된 초점은 특정 이슈 등에 대한 지식이 권력의 작용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고, 결국 인간의 과학은 여타 집단의 관습과 행동을 통제하고자 하는 전문가 집단의 의도와 맞닿아 있게 된다.

  또한 푸코는 언어와의 관계 속에서 의미의 원천이라고 보아진 주체의 전통적 개념을 문제시한다. 라 메니나스의 설명에서 보듯 푸코는 담론 속에서 주체자체가 만들어지는 방식을 강조한다. 담화자체가 지식 및 관습의 개별적 형식과의 관계 속에서 행위자와 주체의 위치를 담지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푸코의 담화에 대한 개념은 뉴맨에 대한 분석에서 다음과 같은 시사점을 갖는다.


(1) 담론구성체에 대한 설명은 우리로 하여금 뉴맨의 이미지를 한 두 개의 예에 구애되지 않고 여러 다양한 표상의 위치 및 그 제시와 연관된 규칙성으로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

(2) 담론개념은 남성성이 기호화되는 개별 담화 코드 및 관습에 주의해야 할 필요를 상기시킨다.

(3) 담화체계를 통한 권력의 작용에 대한 푸코의 강조는 이러한 이미지의 구성에서 작용하는 권력관계를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

(4) 푸코가 강조한 담론의 제도적 차원은 뉴맨이미지가 개별 제도적 관습 안에 뿌리박은 방식을 알 수 있게 하고 이 각각의 위치에서의 표상과 관련된 지식과 행위의 형태에 주의하게 한다.

(5) 주체성의 담론적 생산에 대한 푸코의 주장은 뉴맨의 등장을 패션스타일, 개인적 소비의 현재 시각적 담론사이에서 새로운 주체-위치가 열린 것으로 생각하게 해준다.



4. 남성성의 시각적 코드


  이 글의 서두에서 지적한 것과 같이 뉴맨의 이미지들은 남성육체에 대한 새로운 틀 지움을 나타내고 그것은 수동적인 경향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뉴맨의 이미지의 독특성과 그 이미지속의 남성 그리고 그것이 대상으로 하는 남성이라는 응시의 형태를 지난 10년간의 패션 및 라이프스타일 잡지를 통해 파악해 보자.

 


4.1. ‘Street style'


  먼저 나오는 특징은 거리 스타일로 이것은 모델의 선택에 있어서 육체적 특성과 관련된다. 그림 5.4와 같이 젊고 건장하며 깨끗한 피부를 가진 모델이 선택되는데, 이를 통해 강인함과 함께 소년다움 즉 부드러움이 동시에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부드럽고 강함은 모델의 밝게 그을린 피부를 통해 강화되는데 이것은 흑인의 이미지가 보여주는 성적, 육체적 강인함에 기댐으로써 가능해진다.

  또 복장의 선정도 흑인거리의 문법에 맞추어 이루어진 것을 볼 수 있고 배경도 황량한 도시의 거리이다. 사진의 조명이나 전체적 분위기는 4,50년대의 스타의 초상과 유사하면서 남성적 로맨티즘을 불러일으킨다.

  이러한 이미지들의 또다른 기호화된 특성은 강한 자기 도취적 흡인력이다. 사진 5.4에서 보듯 모델은 자기성찰적이고 우울해 보이는 얼굴로 사진 프레임의 외부를 아래로 응시하고 있다. 이것은 80년대 어려운 시기의 정서를 나타내며 동시에 관찰자를 모델의 나르시스적 흡인으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모델과 관찰자사이의 관계에서 중요한 점은 먼저 이러한 이미지가 표현되는 과정에서 여성의 매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즉 이러한 사진들은 이성적 틀 내에서 기호화 된 것이 아니다. 이에 따라 이러한 특성은 차라리 동성애자에 의해 추구되는 남성성의 전통을 암시한다. 물론 실제 사진들이 게이의 코드를 나타내는 것은 아니지만, 게이를 병적으로 표현하지 않으면서 그 특성을 남성적 스타일에 담아내고 있다.



4.2. ‘Italian-American'


  두 번째의 뉴맨 버전의 기호에서는 민족성에 주의해야 한다. 여기서도 다시 모델의 선정이 중요한 요소다. 어두운 백색 피부 색조와 강한 턱 등은 이탤리안 macho(야성미가 넘치는 남자)의 강인함과 부드러움이 배여 있다. 이러한 모델 설정과 함축적 남성성은 밝은 흑인 모델의 캐스팅과 유사하다.

  장소적 설정도 Italian-Americanness를 보여주며 사진 5.7은 영화에서 컨셉을 따와 그 전체적 패션스토리를 만들고 있다. 필름 재질과 조명을 통해서는 40년대 미국의 흑백영화적 분위기를 조성하며 이를 통해 당시의 고정적이고 보수적이었던 성정체성을 여기서 함축하여 보여주고 있다. 마찬가지로 나르시즘적 특성도 드러난다.



4.3. ‘Conservative Englishness'


  여기서의 모델캐스팅은 백색피부와 밝은 색 머리, 다소 부드러운 외모를 보여준다. 이것은 문명화된 단정함을 암시하게 된다. 복장의 레퍼토리도 중요한 열쇠이다. three-piece 정장, 면 셔츠와 양모 양복을 입은 모델의 사무실 안에서의 설정은 양차 대전의 사이기간 중 영국의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러나 이러한 사진들은 또 한가지 중요한 함축적 의미를 가진다. 이러한 영국적 분위기는 또한 비즈니스 계의 기업가적 코드들을 동시에 나타낸다. 5.9에서 보듯 비즈니스의 코드와 연관된 호전적 남성성(확신에 찬 남성, 경제적 독립)이 강화되고 있는 것이다. 5.10을 보면 이것은 다소 누그러져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론 모델의 자기 도취적 남성다움이 로맨틱한 분위기를 자아내며 드러나고 있다.



4.4. 요약


(1) 모델의 캐스팅(특히 거리스타일과 이태리안 아메리칸 스타일)은 소년적 부드러움과 강인한 남성성을 결합한 양면적 남성성을 기호화한다.

(2) 복장들은 확연히 남성적이고 넓은 어깨와 탄탄한 체형을 강조한다.

(3) 모델들은 자기 도취적 자아 흡인의 기호와 함께 남성적 독립성과 확신성을 함축하는 포즈와 표현을 취한다.

(4) 조명과 필름 재질의 선택은 피부, 머리, 눈 그리고 의복의 재질의 표면적 특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진다.

(5) 이미지의 컷은 그림의 강렬함을 강조하는 쪽으로 행해진다.


  덧붙여 이러한 시각적 코드들은 가상적 관람자를 위한 관찰자적 응시를 만들어냄을 지적할 수 있다. 먼저 가상적 관람자는 남성으로 가정된다. 두 번째 이러한 이미지는 가상적 남성 관람자로 하여금 자신을 그 모델에 투영하는 주체구성을 보여준다. 세 번째 외부 타자를 응시하는 것에서의 즐거움의 조직화를 말할 수 있다. 위의 재현들에서 기호화된 시각적 즐거움이 더 넓은 성 정체성과 성에 대한 설명들과 연관되도록 이끌고 있는 것이다.

  시각적 즐거움은 동일시를 이끌 뿐 아니라 모델에 대한 시각적 바램을 통해 마케팅의 수단도 되고 있다. 이것이 불러일으켜지는 과정에서 동성애자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남성적 감각도 환기됨도 이미 말한 바와 같다.



5. Spectatorship and subjectivization


  푸코의 저작에서 주체위치(subject-position)는 뉴맨에 대한 독해에서 중요하다. 주체성의 개념화에 자리잡고 있는 것은 개인들이 특정 담론적 주체위치에 자리하게 되는 과정이다.

  푸코는 새로운 형태의 지식과 권력의 네트웤의 성장을 통해 개인성의 현대적 형태가 발현되는 것에 주목했다. 푸코는 역사적으로 개인이 담론적 위치에 동일시되는 과정은 담론 안에서의 권력의 작용에 의해 나타난다고 믿었다.

  개인은 그에 대한 권력의 결과로서 특정 담론 안에 자리한다. 이것은 또한 신체의 즐거움, 그 움직임, 관습의 확고화 등을 통해 작용한다. 이것이 개인과 그 행동을 구성하는 권력을 가진 생산적 관계이기도 하다.

  물론 푸코의 시각은 개인에 작용하는 권력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개인의 저항은 무시한 점, 행위를 규율하는 개별적 시도들의 실패가능성은 간과한 점등의 단점도 있다. 이점에서 문화주의 내에서 정신분석학적 접근과 푸코 후기저작에서의 주체화에 대한 유용한 설명을 여기서 이용해 보고자 한다.



5.1. 정신분석과 주체성


  여기서는 뉴맨의 이미지들과 이러한 이미지의 소비자 혹은 관람자사이의 관계를 살피는 세 가지 개념틀을 정신분석학적 접근에서 가져오겠다.


  첫째는 동일시이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 의하면 인간은 성적 욕망의 투영과 관련해서 다른 사람을 가지고자 하는 object cathexis와 그 사람이 되고자 하는(동일시) 욕망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성정체성과 성적 결정이 이루어지는 오이디푸스기는 이러한  cathexis와 동일시양상을 잘 보여주는 시기이며 여기서 동일시는 당시증 - 타인의 신체, 특히 나체나 성기를 보고 기쁨을 느끼는 증상 - 과 나르시시즘이라는 개념들을 통해 이해될 수 있다.

  프로이트는 응시의 즐거움은 인간의 섹슈얼리티의 구성요소라고 말하면서 그것의 한 채널로서 인간의 형상에 대한 매혹 즉 나르시시즘을 들고 있다. 프로이트는 나르시시즘을 통해 동일시의 기제를 설명한다. 물론 그에게 동일시는 단지 scopophilic 욕구의 나르시시즘적 요소만이 아니라 분열적 과정이기도 한 것이다. 아이에 있어 오이디푸스기의 위기는 아버지와의 동일시에 의해 남성 정체성을 확보하고 반대로 여성성의 선택은 억압함을 통해 해결된다. 이러한 과정은 분열적 과정으로 성적 정체성은 굳건하게 완전히 달성되는 것은 아닌 것이다.

  라캉에게 이것은 자아 형성에 있어 거울단계에 대한 설명으로 나타난다. 아기는 거울에 비친 자기의 모습과 자신을 자신을 동일시하는 혼동을 하게 되는데 이러한 동일시는 나르시즘적인 것으로서 이후의 동일시의 원형이 된다.



5.2. Spectatorship


  푸코와 라캉의 이론들은 그들이 기술하는 동일시가 가지는 시각적 특성의 구조 때문에 영화 연구에서 많이 이용되었다. 특히 ‘Screen'을 중심으로한 비평들은 시각 문화의 소비자를 위한 시각적 힘을 말하면서 응시와 동일시의 과정에 대한 설명도 제시했다.

  Mulvy의 ‘시각적 쾌감과 내러티브 시네마’는 정신분석학이 표상의 힘을 이론화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멀비는 각 영화에서 나르시시즘 및 당시증적 특성을 끌어내어 기술했다. 특히 멀비는 당시증적 욕구와의 관계에서 스펙테이터쉽의 개별적 조직화를 단언하면서 응시의 쾌감은 능동적 남성과 수동적 여성으로 나뉘어 있다고 주장한다. 남성인물은 응시의 행위자로서 여성은 응시의 대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여기서는 멀비는 주체위치들 안에서 개인의 위치지움은 당시증적 욕구와 무의식적인 동일시의 흐름의 조직화를 통해서 달성된다고 말하면서 개인과 표상형식간의 접목의 순간을 이론화했다.




  Reading A

  Steve Neale, 'Masculinity as Spectacle'


1. 닐이 초점을 맞추고 있는 영화 장르들의 중심특성은 무엇인가?

  서부극이나 액션영화로 남성영웅이 비정상적으로 힘있고 전능한 존재로 나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2. 남성육체에 대한 에로틱한 응시의 가능성을 이 영화들은 어떻게 제거하고 있는가?

  사도-마조키스틱한 환상들과 장면에 의해 특징지어지는 내러티브라는 구조적 요인에 의해 남성육체에 대한 에로틱한 응시는 제한된다. 내러티브상 대개의 경우 관음적 및 물신적 응시는 대결과 싸움의 장면의 클로즈업으로 처리되면서 전체 장면의 의미 속에서 에로틱함은 사라진다.


3. 남성성의 어떤 특질들이 이 영화들에서 특권적으로 나타나는가?

  남성은 강인하고 능동적이고 영화 속의 행위의 중심으로 내러티브를 이끌며 대상으로서 여성을 추구하고 조사하는 주체가 된다.   




5.3. The spectacle and masculinity


  닐의 논증은 내러티브 영화의 표상적 관습과 스펙테이터쉽의 조직화가 성적 차이와 남성

과 여성사이의 권력관계를 재생산한다는 멀비의 주장을 확증한다. 그러한 이들의 연구도 남성과 여성사이가 아닌 그 성적 범주 안에서의 차이들은 보지 못한다.



5.4. 정신분석학과 영화이론에서의 문제


  멀비등의 연구는 시각적 표상이 각 개인안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역동적으로 설명하는 것이나 이것을 뉴맨 이미지분석에 가져가고자 할 때는 몇 가지 문제가 생긴다. 즉 영화관이라는 고정된 시각을 유지시켜주는 환경에서의 연구를 영화가 아닌 다른 시각적 매체에 적용시킬 수 있는가의 문제가 그것이다. 두 번째 정신분석학에서 도출된 identity에 관한 설명은 푸코가 강조하는 주체의 역사적 성격과는 상치된다는 점이다.

  프로이트 등의 정신분석학은 문화 속의 인간, 즉 주체를 구성하는 근원적 과정을 탐구하는데 이들에게 이 과정은 초역사적인 것이다. 멀비등의 연구는 정신적 구조와 헐리우드 시네마라는 역사적으로 특정한 형식의 표상을 연결시킴으로써 주체의 보편성을 덜어내고 있다. 그러나 그 분석 안에서 보면 결국 역사적이고 사회적 요소는 성적 차이의 근원적 장과 같은 사이코 섹슈얼한 구조의 잣대로 환원되고 계급 등의 다른 결정요소는 사라진다.

  정신분석학이 표상의 장과 개인들 간의 접목에 대한 명확한 설명을 주는 반면, 종국에는 탈역사적이고 지나치게 총체화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다. 이에 푸코의 후기 저작은 주체화에 대한 구체적 이론과 시각적 응시에 설명을 모두 제공한다.



5.5. 자아의 테크닉


푸코는 주체가 상징적 체계에서 구성된다고 말하기는 힘들고 그러한 상징의 작용보다는 실제적 실천에 주체가 구성되며 상징적 체계를 가로질러 주체를 구성하는 기교가 존재한다고 말한 바 있다.

  더 나아가 “Technologies of the self'(1988)에서는 4개의 주된 기교(생산, 상징체계, 권력, 자아를 언급한다. 자아의 기술은 다른 말로 주체위치가 개인에 의해 형성되는 개별적 기교 혹은 실천을 말한다. 푸코는 사적인 일기 등, 자아의 이야기에 대한 기술의 형태를 강조했다.

  이렇게 역사적 주체형성에 대한 강조에서 변화된 푸코의 새로운 시각이 어떤 유용성을 가지는가? 먼저 이러한 시각은 행위자의 형성과 그 과정을 구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하여준다. 또한 실천의 산물로서 신체와 정신적 능력이 이루어짐을 말함으로써 주체형성에 있어 비관념적 요소에 주의를 가져다 준다. 즉 푸고의 ‘자아의 실천’에 대한 언급은 실재 개인들이 담론적 규범의 인용과 반복에 기반한 행위로서 특정한 재현에 접목되는 것을 개념화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이다.

  뉴맨에 있어서도 그 표현영역안에 새겨진 형식적 주관성들이 역사적 존재로서 사람들에 의해 실재하게 되는 방식을 생각함에 있어 ‘자아의 기술’에 새로 주목할 수 있다. 즉 뉴맨이미지와의 관계 속에서 기호화된 남성성의 성격은 소비, 신체에 대한 관리(care), 여가를 보내는 다양한 방식을 통해 역사적 주체로 형성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테크닉의 중심에는 응시의 구체적 형태들이 자리한다. - 광고이미지, 디스플레이, 패션잡지 사진 등.



6. Consumption and spectatorship


  여기서는 뉴맨이미지에서의 응시의 코드를 통해 드러나는 소비자의 위치지움에 대해 살려본다. 위에서 서술한 푸코의 설명을 통해 정신 분석적 맥락에서의 주체형성을 실재 역사적인 형성의 차원에서 다시 살필 수 있을 것이다.


6.1. 재현의 위치


  우선 우리는 뉴맨이미지와 spectatorship의 문제를 이러한 응시가 자리하는 공간으로서 shop의 인테리어의 역할에서부터 살펴야 한다. 뉴맨의 이미지가 판매의 순간에 기호화되는 단계는 먼저 남성의류의 디자인 코드와 판매에서의 전시기술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디자이너에 의한 의복의 디자인, 종류 및 재질과 색의 선정은 그 자체로 문화적 의미를 생산한다. 뉴맨에 있어서도 새로운 형태의 남성성을 형성시키는데 디자인에 있어서의 혁신이 주요한 역할을 했다.

  또 이것은 전시의 기술과 연관된다. 각 의류점에서의 복식 및 마네킹의 전시, 모델의 선정과 그를 통한 사진의 제시 등은 뉴맨이 새롭게 남성의류점내에서 새로운 의미를 가지는 양식으로 나타나게 해 준다. 특히 요사이 의류점에서 보여지는 스펙터클한 전시양상이 이 예가 된다. - 남성복 ‘Next' 상점의 예 ; 로고가 새겨진 창틀과 그 안의 커다란 원도우, 정돈된 디스플레이, 원형화된 내부 쇼핑공간 등등

  중요한 것은 뉴맨의 남성성이 이러한 디스플레이에서의 의류의 선정과 제시 방식, 디자인 등의 결합을 통한 spectatorship의 형태로 형상화되는 점이다. 이제 이러한 스펙테이터쉽의 기원이기도 한 초기 소비문화의 형성을 통해 그 성격을 더 자세히 보도록 하자.



6.2. Just looking


Rachel Bowlby는 그의 책 'Looking'을 통해 현재의 소비문화와 그 시각적 특성의 출현에 대한 몇 가지 유용한 시사점을 보여주고 있다. 벌비는 19세기 후반에 소비문화에 있어서 나타난 두 가지 경향을 지적하는데 하나는 고정가격제에서 판매 인력과 감독자들의 조직화를 포함한 판매의 합리화 및 체계화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바로 상점의 원도우와 내부에서의 상품의 전시와 배치에 대한 새로운 강조였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소비자는 새롭게 그저 구경하는 즐거움을 얻게 된 것이다. 이렇게 시각적 즐거움에 의해 대표되는 소비문화의 성격은 발터 벤야민의 저작을 통해 체계적으로 지적되기도 했다.

Reading B

  ‘ Technologies of looking:retailing and the visual' / Sean Nixon


  벤야민은 일찍이 현대적 삶의 집약으로서 도시의 남자 한량을 지적했다. 특히 이들은 아케이드를 거닐면서 편안함을 느끼는데 이는 전시대의 부르조아지가 살롱을 통해 갖던 감성과 유사한 것이다.

  ①아케이드의 배치와 전시의 기교 등은 그 공간을 하나의 별세계로 만들면서 스펙테이터쉽을 창출해 내고 동시에 이것은 현대 소비적 삶의 핵심이 된다. 여기서 ②벤야민이 말한  fla^neur는 상품의 전시와 소비자간의 새로운 관계를 지칭하는 셈이다. 즉 새로운 시각적 소비자 주체성의 구성을 기술한 셈이 되는 것이다. 특히 여기서 소비자의 응시는 단순히 전시된 상품들에 대한 것 뿐 만이 아니라 윈도우를 통해 비치는 자신에 대한 관찰까지 포함하는 것이다.

fla^neur는 또한 관람자적인 소비자 주체성에 대한 결정 요소들을 암시해 준다. 전시의 기교들과 도시라는 맥락 하에서 나타나는 응시의 방식은 단절된 일련의 응시들이다. 일련의 무한하고 일시적인 요소들의 흐름을 통해 시각적으로 이해되는 방식이다. 보들리아르의 비유를 빌리면 도시 남성의 욕망은 군중 속에서 나타나고 다시 사라져 가는 여성의 모습에 대한 浮游하는 응시를 통해 성격이 나타난다.

즉 ③이러한 응시의 방식은 일련의 성적인 역관계속에서 암시되고 있는 것으로 남성적 즐거움의 추구는 쇼핑의 시각적 대상을 상품에서 여성 쇼핑객에까지 확대시킨다. fla^neur의 응시는 자유롭게 보고 즐기는 현대적 성적 소비를 낳고 있는 것이다. 이를 보여주는 Elizabeth Wilson등의 연구는 또한 19세기가 끝나고 여성을 위한 사무직이 늘어나면서 ‘just looking'의 대열에 여자쇼핑객들도 참가하는 역사적 과정도 제시한다. 뒤이어 경제력이 신장되면서 fashionable한 여성들이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는데 이들은 쇼핑의 시각적 즐거움을 즐기며 동시에 남성적인 (시각적)소비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여기서 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응시의 양식이 소비 및 여가와 연관된 보다 광범위한 응시의 일부를 형성한다는 것이다. ④대중지, 사진 이미지의 확산과 연관된 새로운 저널리즘이 가지는 재현방식은 응시의 기술에 있어 또 다른 구성요소였던 것이다.

  벤야민은 여기서 몇 가지 문화적 의미를 지적하고 있다. 도시의 문화와 소비의 새로운 기쁨을 표현하는 대중 문예 전반은 소비의 현대적 형태에서의 발전과 연관되어있다는 것이다. 벤야민은 그 예로 19세기 중반에 나타나 파리의 도시적 삶을 그려낸 대중 출판물들과 예술품의 거래의 확산과 결합되어 있는 팜플렛 등을 지적한다. fla^neur의 관람자적 주체성은 이러한 문예물 속에 표현된 도시에 대한 시각적 이해 속에서 존재할 수 있게 된다. 또한 이것은 이미지의 민주주의라 부를 수 있는 시각 출판에 있어서의 비용감소에 의해 뒷받침된 것이다. 문화적으로 이러한 사진들은 클로즈업과 병치와 같은 지각의 새로운 형태를 가져왔고,  역시 현대 소비적 삶을 표현하는 새로운 시각방식으로 작용했다.     



6.3. Spectatorship, consumption and the 'new man'


  B글에서 보았듯 fla^neur로 말해지는 시각적 주체성은 1)런던, 파리와 같은 대도시의 쇼핑과 여가의 공간에 집중된 소비적 전시의 기술, 그리고 2)대중적 간행물과 같은 문화적 형식r안에서 시각적 의미의 소비에 의해 형성되었다.

  이 새로운 응시의 중심에는 응시하는 소비주체가 있고 이 subjectivity는 벤야민의 fla^neur에 대한 기술을 통해 비유적으로 제시되었다. 또한 이러한 시각적 관람의 방식은 고정된 것이라기보다는 분절된 일련의 응시로 이루어져 있고 소비자 자신의 시각적 투영 즉 일종의 나르시즘적 차원의 스펙테이터쉽이 형성됨도 위에서 말한 것과 같다.

  결국 이러한 스펙테이터쉽의 방식은 소비에 있어서 현대적 형태의 도래와 연관된 응시를 낳고 있는 것이다. 바로 여기서 19세기 이래의 소비문화라는 역사적 과정과 결부된 시각적 주체의 형성이 밝혀지는 것이고 이것은 소비의 장으로서 의류상점의 전시방식과 간행물에서 드러나는 문화적 소비행태를 통해 보여지며 동시에 그것을 통해 역사적으로 형성된 것이다.



7. 결론


  이 글은 일군의 남성들을 대상으로 하는 새로운 방식의 시각적 표현의 영역 - 뉴맨 -을, 그러한 스펙테이터쉽의 형식적 코드와 연관된 응시방식과 푸코가 말한 자아의 기술 개념을 통한 역사적 주체형성이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탐구해 보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뉴맨이미지의 문화적 의미 파악에 치중하여 남성과 여성의 성차원에서 이 이미지들이 가지는 의미를 살피는 노력이 부족했다. 즉 뉴맨의 이미지에 대응해서 여성잡지 등에서도 새롭게 ‘street style'이라는 불리는 젊은 여성성을 표현하는 양식이 등장했는데 이것은 보다 독립적이고 자기주장이 강한 여성성을 주창하는 이 시기의 페미니즘이 그 바탕에 깔려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젠더와 성적 정체성의 대중적 표현방식에 있어서의 변화와 관련지어야 뉴맨 이미지의 문화적 의미를 보다 충실히 파악할 수 있겠다.

  또한 문화적 힘의 고찰에 있어서 형식적 텍스트 분석이 가지는 한계를 명확히 해야 한다. 이미지들과 함께 그것이 대상으로 하는 집단의 소비행위가 접목하는 과정을 파악하는 시각이 요구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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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7/18 23:15 2008/07/18 2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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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말에 뮤지컬 '지하철 1호선'을 봤습니다.

아시다시피 40만명 가까운 관객이 본 우리나라 창작뮤지컬의 대표작이죠. 연출가는 그 유명한

김민기씨. 그러나 우리의 오여사는 김민기씨를 모른다고 한 것부터 시작해 '세대차이'를 드러내

더니 재미를 느끼는데 있어서도 상당한 '해석의 차이'를 드러내더군요.

  지하철1호선은 그 등장인물들 하나하나가 지금 우리 사회의 계층을 대표합니다. 조선족처녀

'선녀', 창녀 인 '걸레', 가짜 대학생 '안경', 막간을 이용해 굉장한 댄스를 선보이는 복부인

떼거리까지, 그 하나하나가 자신들이 대표하는 계층의 조그만 이야기를 펼쳐서 뮤지컬 전체의

내러티브안에서 우리사회의 전모를 드러내는 '큰 이야기'로 완성되죠.

  그러나 우리의 오여사는 이런 방식에 대해 평하길,

- 10년만 지나도 관객들 모두가 현실과의 괴리를 느낄 이야기이며, 다른 나라 사람들은 전혀

이해 못할 결국 보편성이 부족한 내러티브라고 하더군요.

  물론 추가해서 노래안에 너무 많은 정보와 사회적 이야기를 담다보니 가사전달력도 떨어진다는

미학적 비평도 겸해서...

  그리고느 자신이 좋아하는 매튜 본 안무의 '백조의 호수'를 다시 감상했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지하철 1호선>- 학전그린소극장에서 하고 있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매튜 본의 '백조의호수' - 종전과는 달리 남성들의 군무가 일품이죠.



  곰곰히 생각해보면 이건 비평에 있어서의 미학적 비평과 현실(참여)적 비평./

  예술을 위한 예술과 사회를 위한 예술./ 리얼리즘과 형식주의의 차이랄까? 사소한 의견차이였지만다시 생각해보면 비평과 예술에 있어서의 가장 근본적인 이분법에 우리 부부는 서있더군요. ^-^


  하긴 매튜본의 백조의호수를 보면 비록 주인공 왕자의 모습에서 러시아 옛 왕조의 모순을

조금 느낄수 도 있지만, 그보다는 왕자의 무의식과 그 속에서 보이는 보편적 고뇌의 모습이

주제지요. 이건 확실히 뮤지컬 '지하철1호선'과는 대척점에 있는 의미의 발현입니다. 그리고

이건 백조의 호수류의 작품들 내부에서 느껴지는 집단적 무의식이나 역사적 상징에선

어느 사회에나 존재하는 일종의 원형 'Archetype'가 있습니다. 왕자와 백조의 동성애적 욕망,

그에 대한 금기의 상징, 그것때문에 겪는 왕자의 고뇌 등등. 서구의 예술인 뿐만 아니라, 한국의

무식한 기자도 공통적으로 느낄 수 있는 의미입니다. 그런 점에서 '백조의 호수'가 '지하철 1호선'

보다 더 위대한 예술작품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일본의 회사가 막대한 이익을 남기며 지은 지하철1호선이 왜 다른 선들과는 달리

유일하게 왼쪽으로 진행되는 선인지, 조선족 처녀 선녀가 서울에서 만난 이들은 왜 하나같이

아픈 상처를  가지고 노래해야 하는지는 7,80년대 이후를 산 우리만이 알 수있는

강력한 메세지로 다가옵니다.

  '백조의호수'의 아름다운 무용을 보며 하품하는 저로서는 '지하철1호선'의 강력한 락음악이 더

생동감있게 다가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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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6/25 18:29 2003/06/25 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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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 기든스로 대표되는 일군의 사회학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성찰성이라는 화두로 현대사회를 분석하지요. 요컨대 전통과 압제에서 해방됐다는 현대사회는 자유를 줬지만, 개인의 삶은 언제나 선택과 결정의 혼란스런 연속으로 바꾸어놓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선택도 자본주의 사회의 논리인 상업화에 의해 제한되고 왜곡돼 결국 힘겨운 선택의 연속을 헤쳐나가야하는 개인이 의지할 것은 그런 선택을 통해 자신을 만드는 과정 즉 성찰에서 의미를 찾아야 한다는 논리죠.

  울리히 벡도 이 진영의 쌍벽을 이루는 사람입니다. 기든스와 비슷하지만 좀더 사적영역에 관심이 많고 그는 위험사회라는 말로 현대사회의 문제점을 지적하죠. 좀 엉성하게 이해하면 논리자체는 기든스와 유사합니다만...

  최근에 벡의 저서 '사랑은 지독한 혼란'(원제 'Das ganz normale Chaos der Liebe')를 읽었습니다. 한 석달만에요. 책이 어려웠다기보다는 워낙 머리가 돌이 돼서리...

 벡은 여기서 사랑을 우리의 근대적 삶의 근본적인 위협으로 제시합니다. 이해가 안되는 일이죠.

하지만 앞서 제가 말한 기든스식의 논리, 즉 현대사회의 도래 -> 선택의 증대 -> 혼란과 위험사회 라는 사고로 생각하면 이해가 됩니다.

  근대성의 등장으로 개인은 미리 정해진 신분과 전통의 압박이라는 봉건적 잔재에서 자유로와졌지만  이것은 동시에 개인이 스스로 안정감을 느낄수 있는 토대들도 제거한 것입니다.각종의 유대와 자신을 보호해주던 전통적인 조직들이 해체된 것이죠. 그러자 개인들은 이런 불확실성의 세계를 항해해갈 안전판으로 사랑에 의존하게 됩니다. 바야흐로 사랑은 현대인의 종교가 된 겁니다.

  그러나 사랑은 근본적으로 개인의 개인을 위한 감정입니다. 더구나 현대인의 사랑은 그 이전시대의 사랑이 의지했던 성서의 규범, 사회의 법에서 해방돼 있습니다. 따라서 오직 주관성에만 의지해야  되고 연인들은 사랑을 유지하기 위한 친밀성을 통해 서로를 무장해제 시키죠. 결국 상처주고 싶을때 두사람은 마음대로 서로를 상처주게 됩니다.

무슨 영화를 보아야 할까 극장에는 어떻게 갈까하는 사소한 선택부터, 가정은 어떻게 언제 꾸릴까하는 무수한 선택속에서 의견충돌이 일어나고  옛날과는 달리 서로가 따른 규범이 없는 가운데 갈등은 일상화됩니다. 더구나 사랑하는 대상은 사랑하기에 자신과 가장 가까이 있고, 그래서 결국 가장 강력한 힘으로 아주 자주 서로를 상처주게 되죠.

  그리고 사랑하는 두 남녀가 처한 사회구조는 어떠한가?

사랑의 결실이라는 가정을 들여다보면 이곳은 직장을 잡아 일하는 직업인이어야 한다는 노동시장의 논리와 가장과 아내의 역할, 개인의 자아실현이 충돌하는 전장입니다. 남편은 가정을 지켜주는 아내를 믿고 그녀에게 의존하며 직장에서 일합니다. 그런데 사실 이것은 아내의 희생에서 가능한 것이죠. 공적노동을 하는 남편과 그를 위해 가정잡사를 해야하는 여성이라는 성별분업, 그로 인해 남성과 여성은 서로 공유하는 체험이 극히 줄어들고 사랑하는 두 남녀의 삶은 갈등의 원천이 되고 맙니다.

  가정과 일상의 삶이라는 극히 가까운 곳에서 사회 전체의 논리를 이끌어내는 저자의 글은 재미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책의 번역은 좀 아쉬워요... 한번 여러분도 읽어보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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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1/25 18:26 2003/01/25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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