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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0/20 주인장 <Computation journalism- 저널리즘의 확장 또는 종속 2>
- 2015/10/06 주인장 <Computation journalism- 저널리즘의 확장 또는 종속 1>
- 2009/10/25 주인장 9년전 시험기억 -3번째 (3)
- 2009/10/12 주인장 9년전 시험기억 2번째
- 2009/10/04 주인장 9년전 입사 시험기억 1
- 2009/07/06 주인장 방송기자와 신문기자의 차이(예전 글)
- 2009/02/07 주인장 서류전형에 참가했던 기억 (2)
- 2008/12/02 주인장 작문시험의 실제 예
- 2000/08/16 주인장 수습기자 첫날의 기억-3
- 2000/08/16 주인장 수습기자 첫날의 기억-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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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시험봤던 2000년에는 합숙은 안 했지만 하루만에 거의 비슷한 분량의 시험을 봤습니다.HA(Human Resource)평가라는 건데 이 개념자체가 컨설팅사들이 만든거라 시험자체도좀 황당한 게 많았죠. 올해 우리 회사 시험에서도 짧지만 합숙이 있을 것 같더군요.
아무튼 제가 봤던 2000년의 시험을 돌이켜보면 기자와 피디는 비슷한 틀의 다면평가가 있었습니다. 우선 기자 부문과 피디부문에서 공통적이었던 걸 보면 첫째와 둘째 시간에 '어린이 놀이터 설계와 그 설계안에 대한 토론'이 있었습니다. 각자 한 시간은 놀이터를 설계해 그 개념을 발표하고 그 다음엔 8명 정도로 구성한 한 조가 조원들의 설계도를 모아 하나의 설계를 도출해 내는 거였죠. 저는 푸코의 판옵티콘 개념에서 힌트를 얻어 놀이터의 어느 쪽 출구로도 나갈 수 있는 회전놀이기구가 가운데 있는 희안한 놀이터를 설계했죠. 우리 조에선 가장 특이한 설계였고 비교적 설명도 잘했는데... 사실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짓이었습니다.
나중에 인사부에 놀러갔다 우연히 채점기준표를 봤는데 1교시 설계는 기자들에겐 배점비중이 미미하더군요. 대신 2교시 토론시간의 태도를 평가하는 게 이 시험의 주된 목적이었습니다. 그런데 반대로 같은 시험을 친 피디부문은 설계가 대부분의 배점을 차지하고 토론은 거의 평가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어쨌든 그 토론 나름대로 처음엔 자신의 개념을 굳이 그대로 넣겠다는 몇몇 이들 때문에 시간이걸렸지만 각자 양보와 합의가 도출되며 시간내에 하나를 만들어냈죠. 나중에 보니 처음에 고집 피던 몇몇은 다음 최종면접에선 볼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시간내에 합의안이 안 나오면 그 조 모두가 감점이었죠.
3번째 시간은 아주 골때린 '영희는 여행을 떠났습니다' 시간...
영희가 여행을 떠났다는 말을 시작으로 각 조별로 시계방향으로 돌면서 1분씩 다음말을 만드는 일종의 공동소설 창작시간이었습니다. 여기서 정말 각자의 개성이 나오더군요. 우리 조의 영희도 프랑스, 미국에도 유람을 가는가 하면 북한까지, 심지어 우주까지도 가야 했습니다. 특히나 어떤 이들은 다음 순번 사람이 말을 제대로 못 잇게 아주 엉뚱한 곳에 엉뚱한 상황으로 영희를 보내서 넘겨 버리더군요. 아무도 모르는 프랑스 파리의 어느 뒷골목 이상한 술집에서 전혀 알 수 없는 음식을 시켜는 상황에서 넘기기도 하고, 통일의 중요한 임무를 띠고 김정일을 만나는 상황에 갖다놓고 넘기기도 하고... 역시 채점기준상 이런 사람은 감점대상이었습니다. 여기선 창의성도 중요했지만 기자의 경우 논리성이 더 배점이 높았습니다. 물론 피디는 그 반대였고요. 저의 경우엔 남들이 외국에 보낸 영희를 계속 귀국시켜서 약간 사회적인 이야기로 풀어나가야 했습니다...
그리고 다음은 상황주기 시험. 기자생활을 하면서 겪게되는 몇가지 상황을 주고 그것을 어떻게 해결할 지 써내라고 했죠.
한 문제는 '당신이 마포라인의 기자로 일하고 있다. 그 라인의 연세대에서 중요한 행사를 하게 돼 취재를 하려 하고 있는데, 갑자기 세브란스 병원에 조폭으로 보이는 환자가 칼에 찔려 들어왔고, 동시에 은평구 주택가에 사상자 미상의 화재가 일어났다면 당신은 어찌하겠는가?'하는 문제였습니다.
사안의 경중도 그렇지만 동시다발적인 이 사건들을 어떻게 커버하겠느냐를 묻는 시험이었죠. 기억은 안 나지만, 행사는 주최측에 부탁해 시작시간을 늦춰달라고 하고 조폭은 경찰을 통해 우선 상황을 파악한 뒤 그 사람이 도망갈 상황이 아니면 화재부터 취재한다는 식으로 했던 것 같습니다. 아무튼 어느 것 하나 버리지는 않돼 급한 것부터 한다는 식이었죠.
그런데 제 동기가 된 한 녀석의 가장 기발했던 답은 한 줄의 다음과 같은 답이었습니다. "캡에게 보고해서 캡이 시키는 대로 한다."
어이없는 답이지만 사실은 가장 현실적인 답이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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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무면접과 기자들의 경우엔 카메라테스트가 더해 지지요. 실무면접이야 차장급기자나 피디가 하는데 그냥 면접과 비슷합니다. 시사적인 질문 몇개와 '네가 들어와서 이런 경우를 당하면 어떻게 할래'류의 조직문화에 관한 질문이 이어집니다.
다음으로 카메라 테스트는 자신이 작성한 기사 혹은 문장 세개 정도로 이루어진 방송용 단신기사를 카메라 앞에서 낭독하는 겁니다. 요즘 수험생들이야 의미나 발음상 편의를 위한 띄어읽기의 요령 정도는 알 것이라고 보고요. 한가지 중요한 것은 낭독전에 녹화를 알리는 빨간불이 들어 오는 ENG 카메라의 위치를 미리 파악하라는 겁니다. 낭독하는 도중에 눈이 이리 저리 움직이는 것처럼 보는 사람을 불안하게 하는 것이 없습니다. 특히나 티비화면으로 볼 때는 특히 더 합니다. 쉬는 부분에서 다음 읽을 부분을 눈으로 본뒤엔 다시 처음처럼 카메라렌즈를 응시하며 읽어주어야 합니다. 처음엔 카메라쪽을 봤다가 한번 쉬고나서는 면접관을 보고 그다음엔 또 딴데를 보거나 하든지, 카메라찾느라고 두리번 거리면 안 됩니다.
그리고 당당하게 읽는 것이 중요하죠. 가끔 사투리기가 있는 친구들도 붙는 걸 보면 역시 기자에겐 발음의 정확도보다는 떨지 않는 배포와 냉정함이 더 중요한 채점 척도인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상식시험에 관해 조금 더 얘기해 볼까요. 2003년 당시 제가 속해있던 스포츠취재부에서도 두명의 기자가 상식시험을 출제했습니다. . 대학때 전공을 고려해 출제위원이 선정되고 한 10문제 정도 인사부에 보내면 인사부에서 다시 일부를 취사선택해 최종문제를 만듭니다. 우리 사무실에선 철학전공한 한 선배가 철학을 한 명이 스포츠분야를 맡았지요.
이들은 어떻게 출제했을까요. 그 많이 본다는 스파책 사다가 뒤져서 냈을까요? 당연히 아닙니다. 철학전공 선배는 자신이 공부했던 주요철학자의 핵심주장과 대표서, 논리학 등을 문제화했죠. 물론 철학개론정도 들었으면 10문제 중 8문제 정도는 풀 수 있는 난이도로... 제가 모르모트가 돼서 한번 풀어 봤는데, 정말 2문제정도 틀렸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스포츠는 그해의 스포츠이벤트와 기록들을 중심으로 출제했지요. 사실 그바람에 스포츠가 차라리 가장 시사상식에 가까웠고 아주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다른 인문, 사회, 자연, 언어분야의 문제는 앞의 철학과 비슷한 과정을 통해 만들어집니다. 그럼 대충 어떻게 공부해야 될지 조금 감이 잡히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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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주
이 글은 지금부터 6년전에 제가 3년차 기자이던 시절에 입사시험을 회상하며 쓴 글입니다. 원제는 '3년전 시험기억'이었지만 이젠 '9년전 시험기억'이 돼야 겠죠. 올해 우리 회사가 결국 소수지만 신입사원을 뽑기로 했기 때문에 하나 올려봅니다. 요새 시험경향과 차이는 있겠지만 사실 그래도 시사점은 있을 겁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방송사시험이 진행되고 있지요. 요새 다른 때보단 시간이 좀 남다보니 이른바 '언론고시' 사이트들을 가끔 들어가보곤 하는데 보고 있으면 참 세세한 데까지 많이도 신경들을 쓰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나도 3년전엔 그랬었지 하는 생각이 들곤 하죠.
상식이나 국어류의 필기시험에 대한 기억은 이젠 거의 나지 않지만, 논술에 대한 기억은 그래도 좀 납니다. 사실 필기시험은 어느 정도 수준을 넘기면 어느회사 시험이건 다 통과하게 되어 있습니다. 저도 맨 첫 시험빼고는 그랬죠. 문제는 논술과 면접인데...
제가 MBC를 볼땐 있을건 다있는 전형이었죠. 논술시험도 논작문에 기사작성, 리포팅의 세 과정이 합쳐진 시험이었고, HA도 있었고 마지막엔 물론 최종면접이었습니다.
아무튼 그래서 별 감흥없던 상식시험이 끝나고 논술시험. (참고로 제겐 감흥있었던 상식시험은 한겨레신문사 뿐이었던 것 같습니다. 다방면의 높은 상식을 요구하는 어려운 시험이었죠.)
첫번째 논문시간에는 러브호텔 건설에 반대하는 신도시주민들의 시위에 관한 기사를 주고 이중 한가지 입장을 정해 자신의 주장을 피력하라는 문제가 나왔죠.
주민들의 권익과 사회의 안녕쪽에 초점맞춰서 쓰는 것이 쉬웠겠지만, 저는 사회전체 성원의 관점에서 보면 성적 행복 추구의 권리와 현실적인 수요가 있고 그것을 주민들이 감내할 필요도 있다는 관점을 취했죠. 심한 시위에서 님비현상의 발현이 보인다고 비판도 했고, 타협이 필요 하겠지만 러브호텔 건설자체를 막을 명분은 없다는 결론쪽으로 갔고...
근데 재밌는 건 나중에 최종합격자들끼리 물어보니 의외로 주민에 비판적인 견해를 취한 이들이 3분의 2비율로 더 많더군요.
두번째 시간, 작문은 참 기묘한 문제가 나왔습니다. 20개 정도의 단어를 주고 이 단어들이 다 들어가게 작문을 하라더군요. 그런데 그 단어란게...
'김영삼' 등 정치인 이름이나 추상명사도 있었지만... '엔트로피' 등 컴퓨터나 자연과학 용어, 심지어 '못박을 땅 한 뼘조차 없다'류의 시어까지 있더군요.
도저히 일반적인 논리전개로는 한 글안에 넣을 수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해서 생각한 묘안.
온라인 대화방안의 대화라고 상황을 설정해 놓고 그 다음부터 대화방의 대화를 써놓았죠. 아래와 같이 말입니다.
"- 대화명 '엔트로피 0' : 다들 안녕, 얼마전에 김영삼 전대통령이 이런 말을 했다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뭐 이렇게 해서 대화명으로 웬만한 자연과학 용어는 해결보고, 대신 대화를 정치적인 주제 하나와 인문학적 주제 하나로 잡아서 전개해 나가서 나머지도 해결보되 논지는 있도록 했지요. 그렇게 해서 답안지를 제출하니 감독관이 대화명이 잔뜩 적힌 내 답안지를 이상한 눈으로 보더군요.
뭐 어쨌든 통과했으니 나쁜 성적은 아니었다고 봅니다. 창의적인 내용이되 일관된 논지, 이것이 논작문의 중요한 비결이겠죠.
다음엔 또 기억나는대로 적어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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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원래 2004년에 작성된 글입니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블로그의 데이타를 날린 뒤 이전 글을 시간날때마다 복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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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기자와 신문기자의 차이, 이걸 질문하시는 분들이 꽤있으시더군요.
어떤이는 방송기자는 리포터지 기자가 아니다 역시 펜대를 굴리는 신문기자가 진짜 기자라고
하시는 이가 있는가 하면, 현장과 영상으로만 승부하고 취재원에 직접 렌즈와 마이크를 들이대는
방송기자가 진정한 기자라고 하기도 하고...
경험이 미천한 저보다 더 적절히 대답해 줄 분의 글을 하나 올립니다. 신문기자하다가 경력기자로 우리 회사에 입사한 이상현 선배가 기자지망생의 질문에 답한 짧은 글인데 그래도 핵심이 담겨있군요.
저는 일단 신문기자 3년했고, 방송기자는 1년이 다 되갑니다.
MBC로 올때 면접시 받은 많은 질문이기도 하지만,
신문과 방송의 가장 큰 차이는 현장감에 있다 할 수 있겠습니다.
신문기자는 방송기자보다 깊이에 있어서 훨씬 뛰어납니다.
취재원과 사귀는 깊이고 그렇고, 기사의 깊이, 사고의 깊이 등등.
지면이 넓다보니 사고의 폭과 깊이가 그만큼 넓고 깊어지는것이겠죠.
또 일단 들은 얘기를 기사화할수 있는 장점이 있고, 술자리 등 그만큼 취재원을 만나는 바운더리가 넓어질수 있습니다.
반면 방송기자는 신문기자보다 깊이는 떨어지지만 현장을 많이 누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기자하면 사건사고 현장과 역사의 현장에 선다는
인식이 강하죠. 그런면에서는 방송기자가 신문기자보다 훨씬 가깝죠.
요즘 신문기자들은 현장에 잘 가지 않습니다. 휴대폰, 인터넷 등이 발달되면서 앉아서 취재하는 습성이 일반화가 돼 있죠. 또 직접 만나서 취재하는 것보다 전화 등을 이용하는 것이 신속성 등에 있어서 더 효율적인 취재방법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방송기자는 인터뷰를 해야 하기 때문에 필히 취재원을 만나야 하고 또 사고현장의 그림을 담기 위해 현장에 항상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어떤 사건사고의 정확성을 담기엔 직접 그것을 본 방송기자가 신문기자보다 앞선다 할 수 있겠죠.
선배들은 말합니다. 젊었을땐 방송기자, 늙었을땐 신문기자가 하고 싶다고. 맞습니다. 젊을땐 여러 현장을 누비고 다니는 방송기자가 매력적입니다. 하지만 나이들었을땐 현장을 누비기보단 현상을 종합분석하는 기명칼럼이나 사설을 쓸 수 있는 신문쪽을 선호하게 돼 있죠. 사실 방송기자는 나이들면 별로 할 것이 없거든요. 후배들 기사 봐주는 것 외엔. 물론 일부 앵커나 토론진행자를 제외하곤 말이죠.
주저리주저리 제 생각을 늘어놓았군요. 어디까지나 제 경험에 비춘
매우 개인적인 생각이기 때문에 이것이 모두 옳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다른 기자들은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겠죠.
그리고 몇가지 제가 더 덧붙이자면 일단 노동강도는 방송기자가 휠씬 셉니다. 역시 이상현선배와
비슷하게 한국일보에 계시다가 경력으로 오신 다른 선배의 표현에 따르면 정확히 '세배'가 더 힘들다고 말하더군요. 사실 신문기자라면 모든 상황 끝인 취재와 기사작성 이후에도 방송기자는 더많은 아니 사실 그때부터 본게임이라할 일들이 남아 있습니다.
먼저 오디오 녹음. 사실 시청자에겐 그 기자의 개성과 전달력이 표현되는 대부분의 요인이죠. 별거아닌 것 같지만 기사이상으로 중요합니다. 이건 방송기자의 숙명이에요.
두번째로 영상제작. 방송기자는 들어가자 마자 한시간 정도는 찍어온 그림을 보고 필요한 인터뷰를 모니터해 쓴 부분을 취사선택해야 합니다. 그리고 역시 필요한 자료그림과 음악을 찾고, 컴퓨터 그래픽이 필요하면 그림을 그려 의뢰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다시 그림과 오디오의 편집작업을 해야하죠. 물론 혼자다 하는 것은 아니고 편집자가 붙지만 영상편집 과정 외에 나머지 그리고 어떤 그림을 붙여야 하는지의 판단도 다 기자가 해야 합니다.
일종의 post-production작업이라 할 수 있는데 이것이 보통 취재와 기사작성과 맞먹는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합니다. 결국 방송기자는 기자 + 피디 + 리포터 입니다. 물론 방송이나 신문 어느쪽이 더 우월해서 생기는 차이라기 보다는 영상매체와 활자매체의 차이에서 생기는 매카니즘이랄까요. 어느쪽이 더 난이도가 높다고 비교할 수는 없겠습니다.
그러나 한가지 확실한 건 신문기자는 저녁약속을 쉽게 잡고 일찍부터 잡지만 방송기자는 저녁약속 잡기부터가 수월하지 않고 어떤 때는 다른 사람들이 2차술자리 가는 시간인 밤 10시부터 저녁먹기 시작하는게 보통입니다. 즉 근무시간의 길이에 있어선 방송기자가 KO승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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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한참 전에 끝났지만 우리회사의 신입사원 서류전형에 저도 심사위원으로 참가했습니다. 작년 8월의 일이죠. 전형이 진행중이던 시기에야 당연히 아무말도 할 수 없었지만 이젠 최종합격자들이 연수까지 마치고 부서배치를 기다리고 있으니 당시 경험을 기록삼아 적어봐도 될 듯 합니다.
방송기자직의 지원자는 모두 1700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서류에서 뽑아낼 사람은 500명정도. 별거아니라면 별거 아닌 문턱이고 그래도 달리보면 상당히 많은 지원자를 걸러내야하는 그런 상황이었죠. 회사입장에서도 많은 이들에게 필기시험 기회를 주고 싶었지만 현실적으로 그 많은 사람들의 시험장소도 없고 논술을 포함한 시험채점의 문제까지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잘라내야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무엇보다 큰 문제는 지원자가 무려 1700명이고 이 천칠백명의 신상명세, 영어 및 어학성적, 학교, 특기, 자기소개서 등을 모두 봐야 한다는 것이었죠. 물론 전형위원은 저 혼자가 아니라 3명이었지만 문제는 공정함을 기하기 위해 3명이 지원자 모두의 서류를 보고 채점한 뒤 3명의 평균값으로 최종 점수를 매긴다는 거였죠.
결국 1700명 모두의 점수를 다 매기는데 일주일이 넘게 걸린 대작업이었죠.
당연하게도 영어점수나 학점 등등을 계량화해서 점수를 매기는 방식이 아니라 3명의 전형위원이 마치 입학사정관이 된 듯 처럼 서류에 나타난 지원자의 성향을 보며 기자직에 적합한 인물인지를 평가해 점수를 매기는 평가방법을 써야 했습니다. 물론 주관적인 방법이라는 점에서 한계가 있겠지만 그래서 3명이 중복해서 평가해서 평균을 내 보완한 것이죠. ( 여담이지만 이걸 한 번 해보니 요새 문제되는 고대 수시전형에서 고대측의 변명이 말이 안된다는 것을 다시 느끼게 되더군요. 수만명에 달하는 수험생의 내신과 비교과를 학교별, 과목별 가중치를 모두 계산해서 과학적으로 평가해 전형했다는 그 설명. 아마도 그 설명대로 제대로 하다간 올해 신입생을 내년에 뽑아야 할 겁니다.)
1700명 이나 되다보니 별별 사람들이 다 있었죠. 직업군인, 군 파일럿에 민항기 파일럿(그것도 한명이 아니었습니다...), 고교교사, 소설가, 경찰 등 다양한 직업군이 있었고, 학력제한이 없다보니 고교재학생들까지 있었습니다.
요새는 별로 이상할 것도 없지만 그래도 미인대회 입상자도 있었고, 어떤 나라의 영사까지 지낸 전직 외무공무원도 눈에 띄었고요.
그런데 정작 취업지망생들의 전형이라할 사람들은 오히려 가뭄에 콩나듯 했습니다. 학점 A에 토익은 900이상, 다양한 사회봉사경력을 가진 전형적인 취업지망생들 말입니다. 물론 아예 없는 건 아니었지만 수십장의 서류를 넘겨가야 한 명씩 있더군요. 오히려 대부분은 저의 예상을 빗나갔습니다.
우선 토익점수... 믿기 힘들겠지만 토익 점수 6,700점들이 다수였습니다. 심지어 4,5백점도 수두룩하더군요. 저만 해도 우리 동기들 가운데 토익점수가 거의 꼴찌인데 저 정도 점수를 가진 지원자가 10명 가운데 1명 꼴도 안됐습니다.
학교의 경우 그야말로 편중됨 없이 오히려 서울보다 지방의 비율이 더 높았죠. 이러다보니 우리가 신문이나 방송에서 보는 전형적인 취업준비생의 스펙, 소위말하는 SKY대학에 토익 고득점자는 상당히 소수였습니다.
그리고 고시를 준비하다 방향을 튼 지원자들의 비율이 상당했습니다. 남자지원자들의 경우는 거의 40퍼센트는 된 것 같았고, 여자지원자 가운데서도 상당수였죠. 지원자들도 고시생경험을 그다지 감추려들지도 않았고 자기소개서에 그런 내용을 많이 적어놓았습니다. 특히나 1차시험 통과경험은 플러스가 된다고 생각했는지 크게들 강조해서 적기도 했고...(근데 별로 플러스는 안됐습니다. 1차 통과자는 너무 많아서... 그리고 2차 통과자들도 있었기 때문에...)
아무튼 전형에 참가했던 저 같은 사람들은 예상과 많이 다른 지원자들의 모습에 조금은 놀랐습니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보면 이해가 되기도 하는 모습이었죠.
일단 우리회사의 지원조건에 학력제한이나 영어컷트라인이 없었으니 다양한 학교와 다양한(?) 토익점수대의 지원자들이 몰렸던 것이라고 보여집니다. 또 고시생의 비율이 압도적이었던 것도 같은 이유로 고시생들의 경우 일반회사는 영어점수나 전공에서 제한이 많아 지원이 어려웠을 것이고 그러다보니 우리 회사로 몰리게 되었겠죠.
그러나 전형자들 입장에선 수년간 책상에 앉아서 법전 파던 이들이 사회현장의 목소리를 찾아다녀야 하는 기자를 하는데 적합한지 조금 신경쓰며 서류를 봐야했고...(그러나 그렇다고 고시생경험을 무조건 숨기라는 건 아닙니다. 숨겨봤자 재학중 장기간 휴학했거나 졸업후 경력없으면 어차피 고시생이라는 다 압니다.) 지원자의 토익이 삼, 사백점이더라도 토익점수를 그 정도에 머물게 하면서 그 대신 열심히 노력하고 경험을 쌓은 부분이 있다면 다 감안해 줬죠. (그러나 그런 사람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결국은 일찌감치 기자나 피디를 하겠다고 마음먹고 준비한 이들, 그러니까 남들만큼은 노력해서 적당히 따놓은 토익점수에 평상시 신문이나 TV를 유심히 보면서 기자나 피디직에 대한 개론수준의 소양은 갖춘 사람이라면 거의 통과할 수 있었을 거라고 봅니다. 갑자기 계획에 없이 지원한 것으로 보이는 이들이 대다수였으니까요.
직업의 선호도에서 언론직도 큰 부침을 겪고 있는 중이니 올해는 또 어떻게 변할 지 모르겠습니다. 그나저나 그저 서류전형에 참가했던 경험을 기록삼아 끄적인 것이니 혹시 언론사 지망생들은 크게 의미를 두진 마십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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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제가 운영하던 홈피에 있던 기자시험과 관련된 자료들을 조금씩 옮겨와 봅니다.
제가 시험보던 때는 이미 8년전이라 아직도 조금이나마 도움될 것만 골라서 싣습니다.아래 작문은 동아일보 시험에서 제가 실제로 작성했던 답안입니다. 출제된 제목은 '방'이었죠. 결과는 일단 성공적이어서 최종단계인 인턴과정까지 가긴 했는데...
마지막 단계에서 미역국을 먹었죠. 나중에 중학교 선배이기도 했던 동아일보 기자분에게 물어보니 제가 인턴과정에서 치른 두번의 토론시험에서 모두 일등이었지만(우리말로 한 토론은 일등,영어로 진행된 외국어토론은 뒤에서 일등...-_-), 기사작성이 너무 상투적이어서 떨어졌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일면 순응하면서도 납득하기 어려웠던 것은 그때 잘 쓴 기사라고 기자들이 예를 든 기사들이 제 관점에선 참 받아들이기 힘든 글들이었죠. 지나치게 재미를 추구하고 이색적인 방식으로 쓴 글이어서 차라리 스포츠지기사와 비슷해 보였거든요. 지금 생각해 보면 인터넷 등과도 경쟁하면서도 읽힐만한 글을 선호하느라 글의 양식도 변해가는 신문기사에 아카데믹한 사고방식이 강했던 제가 못 따라간 것이었던 듯 싶습니다. 우리 방송도 제가 초년차이던 때와 비교하면 이젠 정말 높은 시청률을 끌만한 내용과 영상을 추구하는 면이 강해졌으니까요.
아래 작문의 제목은 '방'입니다. 신문사 작문의 특징 중 하나는 한자짜리가 제목이 출제가 잘된다는거죠.
'방'
“내 방에는 세 개의 의자가 있다. 하나는 사교를 위해, 하나는 우정을 위해,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고독을 위해…….”
‘월든’으로 유명한 소로우는 자신의 방을 이렇게 묘사했다. 그의 외딴 오두막의 방은 그렇게 쓰인 것이다. 고독이라는 벗을 맞이하는 여유까지 갖추고서. 그러나 나의 방에는 하나의 의자가 있다. 컴퓨터와 책상을 오고가는 그 단 하나의 의자.
“메일이 도착했습니다.” 컴퓨터로 의자를 끌고 간 내가 처음 듣게 되는 목소리는 언제나 그렇듯 편지함 모양의 아이콘을 클릭하게 한다. 광고물들, 어딘지 알 수 없는 동호회에서 온 메일들 속에서도 나를 이끄는 것들은 있다. 지난 밤 들러 게시판에 글을 남겼던 어떤 홈페이지 주인의 답장이 들어와 있다. 유명 영화를 소재로 직접 그린 캐리커처들로 장식된 그 곳 한 귀퉁이에 올려진 그녀의 사진 아래에 남겼던 나의 인사말. 그에 대해 웃음(정확히는 기호 ‘^_^’)으로 시작해 나를 초대하는 그 편지에, 나 또한 웃음과 함께 기약하기 힘든 다음 약속을 보낸다.
12시가 넘은 늦은 밤 다시 의자에 앉는다. 동호회의 게시판에 들러서, 수업을 듣고 다시 학원에서 영어와 싸운 일상사를 적당히 포장해 업로드한다. 그리고 역시 비슷한 일상을 보냈을 친구들에게 메일을 보내고 대화방에서 얘기를 나눈다. 이들과의 우정어린 대화는 컴퓨터의 파워스위치가 내려감과 함께 끝이 난다. 디지털화된 우정의 교환, 그것은 당연히 그 스위치의 단락에 의해 끊김과 이어짐을 반복한다.
그리고 이제 나는 다시 홀로 앉아 모니터에 비친 나를 바라본다. 마지막으로 책을 보다 잠든 적이 언제였던가? e-mail과 인터넷 대화가 아닌 나만의 사색을 위해 이 의자에 앉았던 시간들은? 이전의 그런 시간들이 없어진 것과 나와 내 주위의 사회에 대한 고민의 흔적들이 점점 사라지고 있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어느덧 내방의 의자는 더 이상 고독을 위한 자리가 아닌 것이다. 대신 불안한 나를 채워줄 e-mail의 메시지를 기다리는 우정과 사교의 자리가 된 것이다. 그러나 나의 마음이 고독에 익숙하던 그 이전보다 더 가난하게 느껴지고 소로우의 외딴 오두막이 떠오르게 되는 것은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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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전 글을 보면 아시겠지만, 수습기자시절 나의 일상은 보통 이
랬습니다. 새벽 3시 첫 순찰(원래 2시 30분이었는데 일주일 지나니
까 요령이 생겨서 조금 뒤로 갔죠.) - 5시 30분 일차보고 - 7시 2차
보고 - 아침 취재 - 10시 30분 신문 기사 마감 - 보통 기획기사류
의 오후취재 - 6시 회사복귀 - 12시 라인별 경찰서로 복귀.
여기서 보면 회사에 복귀한 뒤 다시 경찰서로 돌아가기까지의 시
간이 많이 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겁니다. 물론 일지쓰고 취재한
내용으로 습작기사를 쓰는 시간이기도 하지만 회식 또는 야간의 스
페샬프로그램이 마련된 경우가 많죠. 보통 3일을 주기로 하루는 그
냥 회사에서 기사쓰며 보낸다면, 그 다음날은 폭탄주가 한 다섯 잔
이상 씩 도는 회식이 있고 그리고 다음날은 특별취재거리가 떨어지
곤 했습니다.
그 특별 취재들... 새벽시장 취재, 총선과 맞물려 한참 진행 중이던
시민단체 취재 등도 있었지만, 제가 가장 생생히 기억하는 것은 따
로 있습니다.
2주 째로 접어든 첫날이었을 겁니다. 항상 웃는 얼굴로 정겹게 온
갖 욕들을 천연스레 하기로 소문난 관악서의 일진이 우리를 소집했
습니다.
"너와 너는 영등포역 뒷골목, 너와 너는 청량리, 너, 너는 천호동,
그리고 너와 전봉기는 미아리‚"
우리는 생각했다. 이 지명들의 공통점을... ? -> ! -> -_-.
선배는 말했다.
"그래 맞았다. 오늘 너희는 사창가로 취재를 나간다. 일차 인터뷰
대상은 그 곳의 아가씨들이다. 시간되고 돈되면 취재끝내고 자유행
동(?)도 무방하다. 단 개인경비로 충당토록. 이상.‚"
기억하는 분도 있겠지만 당시는 종암서 김강자서장의 취임이후 매
춘이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던 때였다. 마침 김서장 취임 한 달이 지
난 때라 달라진 윤락가의 모습„ 정도의 기사를 위한 취재로 우리가
투입 결정된 것이다. 하필 나는 가장 중요한 바로 그 미아리 텍사스
를 맡게 된 것이다. 중요한 곳이라 나 외에도 둘이 더 가게 되었다.
비록 거기서 가까운 동네에 살고 바로 그 골목 건너편에 있는 S
고교를 졸업했지만, 여전히(?) 내게 그 곳은 미지의 영역이었다. 이
미 TV등에서 여러 번 비춘 곳이었지만 내게는 참으로 새롭고 난감
한 취재대상이었다.
그러나 어쩌랴 우리는 우선 그 골목 입구에 있는 월곡파출소부터
들러 그곳의 분위기 등에 대한 사전취재를 시작했다. 대충 취재를
마치고 나서는 우리에게 파출소장이 말했다.
"경관 몇 명 함께 보내드리겠습니다.‚
아니오. 됐습니다. 그러면 취재가 잘 안 되죠.‚
하지만... 후회하실 걸요.‚"
소장은 나서는 우리에게 의미 모를 웃음을 보냈다. 어쨌든 우리는
보부도 당당하게 그 골목으로 들었다. 그러자 아줌마들이 달려와 우
리를 이끌었다.
어서 오세요. 우리 집 아가씨들이 예뻐요.‚ 아니오 우리집이...‚
저희는 기잔데요...‚
그러면서 우리는 이 아줌마들부터 인터뷰할 생각으로 취재수첩을
꺼내들었다. 그러자 아줌마들...
진짜 기자잖아... 그래 너희들 잘 만났다. 니들 땜에 우리모두 굶
어죽게 생겼다. 이 놈들아...‚
그 이후의 기억은 내게는 마치 파노라마의 장면들처럼 떠오른다.
우리 셋은 앙칼지게 소리지르며 덤비는 아줌마들의 손과 깍두기머리
아저씨들의 주먹을 피해 그 골목의 여기저기를 뛰어다녀야 했다.
김서장의 취임과 그에 이은 단속과 심지어 단전, 단수 그리고 혐
오시설 운운하는 기사와 TV의 고발성 보도에 그 곳 사람들의 언론
에 대한 반감은 극에 달해 있었던 것이다. 그 판에 병아리 기자들이
나타났으니 정말 그들에게 찾고 있던 화풀이 대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쩌랴 우리에게는 그 아줌마 아저씨들 이상으로 일진선배
들이 무서웠다. 나와 동료들은 때리는 그 손과 주먹을 붙잡고 말했
다.
"여러분들 심정 이해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번에 이곳이 가지는
나름의 사회적 역할(?)과 여러분의 고충을 기사화하려는 겁니다.‚"
대충 이런 식으로 달랬다. 아무튼 그 순간 내 머리속에 떠오른 것
은 이런 말이었다.
"What the hell I'm doing here?'
그런 끝에 그래도 좀 나이든 아줌마, 아저씨들을 대상으로 대충
인터뷰할 수 있었다. 마지막에는 그 곳에서 장사하면서 아이들을 모
두 대학보냈다는 한 아줌마의 포장마차에서 오뎅국물로 추운 몸을
덥혔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목표였던 아가씨들의 인터뷰는 할 수가
없었다. 그 투명한 유리벽너머로는 절대 우리를 들여보내지 않았던
것이고 우리는 단지 유리벽 너머의 그녀들을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터덜터덜 그 골목을 나오는데 동료 한 명이 말했다.
확실히 변하긴 변했어‚, 뭐가?‚
물이 옛날같지 않아, 차라리 내 단골집이 있는 청량리가 휠씬 나
은 것 같아.‚, -_-‚
종암서의 골방으로 돌아와 나는 생각해 보았다. 저 사람들을 이
곳에서 싹 쓸어낸다면 문제가 끝인가? 어차피 수요는 있고 그렇다면
어딘가에서 공급은 이루어질 것이다. 그리고 무엇이 혐오스럽고 무
엇이 깨끗한 것인가? 골치만 아프다. 맨날 이런 것만 취재해오라고
하지는 않겠지...
어쨌든 그로부터 2주 뒤 나는 이런 고민에서 해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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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암서의 2진기자실
나는 지금도 그 때를 생생히 기억합니다. 종암경찰서의 종로라인 (종로경찰서, 성북서, 종암서 등의 경찰라인과 참여연대, 경실련 등 시민단체를 주요 취재처로 하는 서울 중심부의 영역) 2진 기자실에 처음 들어서던 때를...
수습생활 시작한 지 3일째. 비록 일진선배는 그 쪽으로 가라는 말은 안 했지만, 그래도 이제는 형사계 쇼파가 아니라 기자실에서 잠다운 잠 좀 자야겠다고 생각하고 들어서던 그 때, 종암서 밤 12시 30분.
문을 연 순간. 나는 공감각적 체험을 해야 했다. 방가운데에는 빨간 내복을 입은 한겨레 B기자가 자고 있었고, 그 옆에는 몇 시간 전 총선시민연대 사무실에서 보았던 카키색 사파리 잠바의 깃을 세우고 멋있게 담배를 피던 연합뉴스의 여기자 C씨가 역시 한 이불을 덮고 세상 모르고 뻗어 있었다.
문가쪽에는 한국일보의 L기자가 정말 불쌍하게 노숙자 자세로 쪼그리고 자고 있었다. 그리고 냄새들... 누군가의 발 냄새와 찌든 담배냄새의 묘한 배합은 삽시간에 내 코를 마비시켰다.
방안 여기저기에는 담배꽁초가 굴러다녔고, 각종 사건조서, 일지, 기사문 등이 나뒹굴고 있었다. 가끔 늦게까지 술 혹은 스타크를 즐기다 막차시간 지나면 찾아가던 내 친구 황가네 자취방도 이거에 비하면 특급호텔이었다. 그래도 별 수 없었다.
C기자를 발로 대충 밀고 L기자를 좀더 문가 쪽으로 밀어붙인 뒤 나는 그 틈에 자리를 잡았다. 눕자마자 몇 개인가의 굴러 다니는 볼펜들이 등에 배겼다.
그리고 두 시간 뒤 자고 있는 그 들을 남기고 나는 출입처 순찰을 돌러 출발했다. 한시간 후에는 연합뉴스 C기자가 역시 나처럼 기자실을 나설 것이다.
그리고 또 1시간 후에는 조간신문기자 B와 L이 그 뒤를 따를 것이다.
그러면 서장이 선물했다는 TV와 각자의 핸드폰 충전기, C기자의 헤어드라이기만이 텅 빈 기자실이라는 이름의 골방을 지키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밤 11시부터 다시 아까의 역순으로 기자라는 이름의 방주인들이 들어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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